"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조지훈 시 ″승무″는 사도세자 혼이 깃든 수원 용주사가 무대다. 그는 열아홉 살 무렵 용주사의 재(齋)에서 승무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시상(詩想)을 얻었다. 지훈이 용주사를 다시 찾은 것은 마흔다섯 즈음인 1960년대 중반이었다. 이때는 문학 청년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 위원으로서였다. 당시 용주사는 역경 사업의 중심이었다. 지훈은 미당 서정주 등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듬는 데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추사 김정희는 팔만대장경을 보고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이라고 했다. 거기 들인 노력과 정성이 그렇다는 뜻이다. 고려 선조들은 부처님 은덕으로 몽골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나무판 8만 장에 새긴 대장경을 16년 만에 완성했다. 가로 72㎝, 세로 26㎝, 두께 3㎝ 판 앞뒤로 644자를 새겨 넣었다. 모두 합치면 5200여만 자. 인쇄용이니까 글자는 물론 뒤집어 새겨야 했다. 어떤 한자는 62획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앞면 다 새기고 뒷면 어딘가에서 한 글자 삐끗하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경판에서도 오자(誤字)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무는 주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동백나무를 썼다. 판이 갈라지거나 휘는 걸 막으려고 통나무째 바닷물에 3년 담갔다. 글자를 다 새긴 뒤에는 벌레가 먹지 않도록 일일이 옻칠을 했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판전(板殿)은 통풍과 습도 조절이 절로 되도록 했다. 1979년 정부가 많은 돈 들여 최신 설비를 갖춘 콘크리트 건물을 따로 지었지만 대장경 보존에 문제가 생겨 없던 일이 됐다.
▶이제까지 팔만대장경 경판 숫자는 8만1258개로 알려져 왔다. 1915년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라 백과사전이나 국보 도록,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료까지 모두 그렇게 써 왔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대장경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며 다시 세어보니 이보다 94개 많은 8만1352개였다고 한다. 학계 논의를 거쳐 관련 기록을 바꿔야 하게 됐다.
▶일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팔만대장경을 송두리째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한 일이 있다. 무게가 280t이나 됐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팔만대장경이 풍전등화 같은 나라 사정 속에 만들어지고 온갖 우여곡절 겪으면서도 다치지 않고 오늘에 전해 온 게 기적이다. 팔만대장경을 현대화하고 잘 활용해 정신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 이에 버금하는 문화유산을 낳아 후손에게 전해주는 게 우리의 숙제 아닐까. - 김태익 블로그논설위원실E-mail : tikim@chosun.com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