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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꽃을 피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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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꽃을 피우라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눈부신 봄날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가 우리 생애에서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때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고맙게 여겨지고, 언젠가는 내가 이 자리를 비우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오늘의 만남이 고맙고 기쁘게 느껴집니다.

요사이 절에 연등이 많이 걸려서 꽃과 잎을 제대로 볼 수 없는데, 꽃을 머금은 나무와 풀들이 이 봄을 맞아 저마다 자신의 꽃을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나무들도 최초로 잎을 피울때는 각자 자신의 특성과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자기만의 빛깔을 내뿜습니다. 여름이 깊어지면 다 같은 초록색이 되지만, 처음 잎이 펼쳐질 때는 그 나무가 지닌 독특한 빛깔을 내놓는 것입니다. 가지마다 돋아나는 잎들도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내보이면서 찬란한 봄을 이룹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봄이 오면 꽃이 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이 오게 됩니다. 꽃이 없는 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대지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봄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침묵의 봄을 두려워 합니다.

요즘처럼 세계가 과소비로 치닫는다면 언젠가는 침묵의 봄이 올 것입니다.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해마다 우리가 계절을 맞이하지만 그때마다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금년만 하더라도 봄인데 벌써 여름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늦은 봄까지도 눈이 내립니다. 예상하기 힘든 기상이변입니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꽃은 우연히 피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꽃이 피고 지는 것 같지만,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의 그 배후에는 인고의 세월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참고 견딘 세월이 받쳐 줍니다. 모진 추위와 더위, 혹심한 가뭄과 장마, 이런 악조건에서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온 나무와 풀들만이 시절인연을 만나서 참고 견뎌 온 그 세월을 꽃으로 혹은 잎으로 펼쳐 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꽃과 잎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가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꽃이나 잎을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은 어떤 꽃과 잎을 피우고 있는지 이런 기회에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꽃으로 피어날 씨앗을 일찍이 뿌린 적이 있었던가?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을 열어 보입니다. 준비가 없으면 계절을 만나도 변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계절을 만나서, 시절 인연을 만나서 변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주관적인 견해인지 모르겠지만, 매화는 반개했을 때가, 벚꽃은 만개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또 복사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환상적이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꽃의 자태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남은 여백의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습니다. 반만 핀 벚꽃은 활짝 핀 벚꽃에 비해서 덜 아름답습니다. 복사꽃을 가까이서 보면 비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본질이 가려집니다. 봄날의 분홍빛을 지닌 환상적인 분위기가 반감되고 맙니다. 이렇듯 복사꽃은 멀리서 보아야 분홍빛이 지닌 봄날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꽃이 지닌 맑음과 뚜렷한 윤곽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꽃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꽃이나 사물만이 아니라 인간사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멀리 두고 그리워하는 사이가 좋을 때가 있고, 가끔씩은 마주 앉아 회포를 풀어야 정다워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늘 함께 엉켜 있으면 이내 시들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그 우정이 시들지 않습니다.

요즘은 높은 산, 낮은 산 할 것 없이 산벚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늦은 봄부터 초여름에 이르는 이 계절에 산벚나무가 온 국토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산벚꽃을 볼 때 나무의 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자연의 조화와 신비 앞에 숙연해 지기까지 합니다.

식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 붙박여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한 치도 옮겨 갈 수 없기 때문에 꽃과 씨앗으로서 자신의 공간을 넓힙니다. 현재의 산벚나무들은 사람의 손으로 심어서 가꾼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의 손으로 심어서 가꾼 나무들이라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줄을 맞추어서 심었거나 하면 무엇인가 거부감이 들 텐데, 자연이 뿌려 놓은 나무들이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산벚꽃 자신이 꽃과 씨앗으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꽃은 벌들을 불러들여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버찌가 달짝지근한 것은 벚나무 자체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새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런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새들은 그 버찌를 따 먹고 소화되지 않은 씨앗을 여기저기 배설해 놓습니다. 배설된 씨앗에서 튼 움이 온 산에 벚꽃을 피우게 됩니다.

여기에 자연의 조화와 신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식물의 지혜를 우리는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또한 봄날의 은혜라 할 만합니다.

불자들이 습관적으로 가장 많이 외우는 <천수경>이 있습니다. 절에 법회가 있을 때마다 <천수경>과 <반야심경>은 빼놓지 않고 외우지 않습니까? 뜻을 생각하면서 외우면 참 좋은 법문인데, 건성으로 따라 외우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천수경>에 ‘도량이 맑고 깨끗해서 더러움이 없으면 도량신이 상주한다’ 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느 절이나 그 도량을 보살피고 지키는 도량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량신이 그 도량에 사는 사람이나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낱낱이 보살피고 지켜 줍니다.

신앙심이 지극한 사람들은 일주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도량이 지닌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식이 맑은 사람들, 정신이 맑고 투명한 사람들은 어떤 절이든지 도량에 들어서자마자 그 절의 분위기나 신성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도량신은 그 도량의 귀한 존재는 사람이든 나무든 그 도량에 머물도록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도량에서 필요로 않는 존재는 거부합니다.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도량신은 그 도량에 필요한 존재는 사람이든 나무든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는데, 그 도량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존재는 거부합니다.

이런 현상은 굳이 예를 들출 것도 없이 반세기 남짓 크고 작은 도량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저 자신의 체험적인 진실입니다. 개인의 의지만 가지고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도량신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주관합니다. 그 도량신의 의지가 개인의 의지에 작용해서 모든 일을 주관합니다. 그 도량신의 의지가 개인의 의지에 작용해서 모든일을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승가의 생명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청정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청정성은 진실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곧 승가의 생명력은 청정성과 진실성에 있습니다. 길상사를 가리켜 ‘맑고 향기로운 근본 도량’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절이 과연 맑고 향기로운 도량인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이 절에 사는 스님들과 신도들, 또는 이 절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불자들의 삶이 저마다 맑고 향기로운가, 맑고 향기롭게 개선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과 진실을 말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의 사회적인 영향력, 메아리입니다. 도량에서 익히고 닦은 기도와 정진의 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이웃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시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절이 생기기 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절에 다닌 지 10년, 20년 되었다는 신도들을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절이나 교회에 다니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분들의 절의 재정에는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각자의 신앙생활의 알맹이에는 소홀합니다.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면 안 됩니다. 습관적으로 다니니까 극단주의자들이 “종교는 마약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절에 가는가? 왜 절에 가는가? 그때 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개선됩니다. 삶을 개선하지 않고 종교적인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내가 절에 나가는가. 무엇 대문에 내가 교회에 나가는가 그때그때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서 신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길상사가 생긴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의 여러 불자들의 신심과 정성으로 현재와 같은 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건물은 한때 존재하다가 없어집니다. 절이 있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건물이 있기 전에 먼저 진리추구가 있었습니다.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량에 사는 사람들과 도량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여러분의 삶이 맑고 향기롭게 개선되어야만 비로소 도량다운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한때 머물다가 떠나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스님들한테는 원래 자기 집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 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들은 자신뿐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면서 그 도량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신앙심이 지극한 여러 불자들이 곧 그 도량의 수호신입니다. 이런 도리를 분명하게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길상사도 이제는 안팎으로 변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도량에 인연 맺은 여러분 각자의 삶이 나날이 맑고 향기로워져야만 이름 그대로 맑고 향기로운 근본 도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재가불자들이 승단에 귀의하는 것은 그 청정성 때문입니다. 청정성과 진실성이 승가의 생명력입니다. 스님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세속적인 인정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흔히 “나만 믿고 살라.”고 하면서 신도들에게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중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자기 집도 떠나온 이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믿을 게 따로 있지, 그런데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부처님이 “나만 믿고 살라.” 같은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그 밖의 것은 다 허상입니다. 여기에 불교의 참 면목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허상입니다. 자귀의 법귀의, 의지하고 기댈 것은 자기 자신과 진리밖에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나는 잎과 꽃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각자 험난한 세월을 살아 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꾸어 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치시기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갑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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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23: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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