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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死者의 書 (바르도에서 들음을 통한 대 해탈)

불교설화.jpg


티벳 死者의 書 (바르도에서 들음을 통한 대 해탈)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The Great Liberation through Hearing in the Bardo


192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인 에반스 웬츠 박사가 편집한《바르도 퇴돌》이《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서구세계에 일으킨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서양 심리학계의 거장 칼 융은 1938년에 출판된 스위스 초판본의 해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티벳 사자의 서》의 초판이 나온 이래 나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언제나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인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너무 많이 말하게 하거나 말이 별로 없게 만드는《이집트 사자의 서》와는 달리《티벳 사자의 서》는 원시적인 야만인이나 신들의 세계가 아닌 인간 존재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지성적인 철학이다. 그 철학에는 불교 심리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책이다."

웬츠 박사는《바르도 퇴돌》의 필사본을 인도 다르질링의 한 사원에서 구한 후 시킴으로 건너가 티벳 승려인 라마 카지 다와삼둡의 정식 제자로 입문하여 5년 간 가르침을 받았다. 그 이전까지 그는 신비한 동양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5년 이상의 시간을 야자나무가 늘어 선 스리랑카의 해변으로부터 인도 대륙을 거쳐 빙하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고지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양의 현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때로는 도시 속에서 살았고 때로는 밀림 속에서도 살았으며, 요가 수행자들과 함께 산 속의 토굴에서 살았다. 때로는 승려들과 함께 사원에서 살았고, 때로는 구원을 찾는 군중들 틈에 섞인 먼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19년 시킴의 강톡에서 그들은《바르도 퇴돌》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은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했고, 에반스 웬츠는 그가 구술하는 주석과 해설을 받아 적고 책의 편집을 맡았다.

《티벳 사자의 서》는 웬츠 박사의 초판(이하 웬츠본)이래 지금까지 두 번 더 영역되었다. 두 번째 영역은 1975년 프란시스 프리맨틀과 촉얌 트룽파 린포체가 번역했고(이하 트룽파본), 세 번째 영역은 1994년 달라이 라마의 서양인 정식 제자이며 현재 콜롬비아 대학의 종교학과장인 로버트 서먼 스님이 번역했다(이하 서먼본). 한글 번역은 웬츠본은 류시화 선생이 했고, 서먼본은 정창영 선생이 했다. 필자가 번역한 이 책은 트룽파본이다. 몇 해 전 류시화 선생의 번역을 구입하여 읽었을 때 사람이 죽은 뒤의 의식 상태를 비로소 알게되어 기뻤다. 사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다음 생을 받는지에 대해 티벳 스승들은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명료한 의식을 가진 채 다시금 인간의 육체 속으로 환생한 후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티벳 사자의 서》는 원래 죽은 자를 위해 읽어주는 경전인데, 웬츠본은 해설과 주석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막상 독송을 하려고 하면 지나치게 꼼꼼한 주석과 소제목의 분류 때문에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amazon.com)을 통해 웬츠본 외에 다른 번역이 있음을 알았다. 첫 눈에 들어 온 것이 트룽파본이었다. 미국의 영화배우 리차드 기어가 170분 동안 그 책을 녹음한 테이프도 있었다. 책과 테이프를 구입한 후 틈 나는 대로 테이프를 들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리차드 기어의 담담하고 명료한 리딩을 원서와 대조하며 듣다가 뜻이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영어사전을 펼쳐들고 단어를 찾아보기 시작하다가 아예 한글 독송용으로 만들어 보자고 한 것이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이다.

웬츠본은 250페이지에 깨알같은 각주가 150여 개 달려 있다. 그러나 트룽파본은 120페이지의 얇은 책이다. 본문의 주석도 20여 개에 불과하다. 군더더기(?)를 모두 뺀 담백한 내용이어서 독송용으로는 그만이다. 서문에서 프리맨틀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웬츠본의 몇 가지 오류를 바로 잡고 있다. 그리고 웬츠본은 1927년대 영국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현대인을 위한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다. 두 책을 대조해본 결과 본질적인 내용에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중에 번역된 모든 번역본은 웬츠본의 바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만큼 웬츠본의 선구적인 역할은 위대한 것이다.

역자는 죽음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해주는 일이라고는 이미 죽은 뒤에 통보를 받고 영혼을 위로하는 시달림을 해 주거나 사찰에서 재를 모시는 정도였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형식적일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마음이 허전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들이 하는 일이란 서둘러 묻어버리거나 화장하여 재를 흩어버리는 정도다. 그나마 종교의식을 통해서 장례를 치를 때는 조금 나은 편이다. 집에서 치르는 장례는 망자를 위한 축원 하나 없이 죽은 지 삼일이 되면 허겁지겁 관을 장의차에 실어 나르는 것이 고작이다.


경비를 문제삼아 아예 49재를 무시하거나 지낸다 하더라도 아주 간략하게 형식에 치우친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말로 어려운 형편이어서 절에서 재를 다 못 지낸다 하더라도 자손들이 오롯한 마음으로 집에서 망자를 위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남은 자들이 망자를 생각하는 정성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경전에는 사자에 대한 안내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이 해야할 일까지도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안다면 마음이 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송용이 필요한 것이다.

트룽파본이 독송용으로 좋기는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다. 먼저 이 책은 서먼 스님의 지적처럼 웬츠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번역이기는 하나 해설에서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서 현대 심리학에 밝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실제로 번역에 가장 힘이 들었던 부분이 이 해설 부분이었고, 따라서 이 부분만큼은 번역이 잘 되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또 경전 본문에 대한 주석도 거의 없기 때문에 티벳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막연하고 환상적인 장면의 나열로 보일 수 있다. 이 책은 강의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 같다. 즉 이 책은 스승으로부터 한 대목 한 문장마다 설명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원전 같은 번역본'이다. 웬츠본의 해설에서 웬츠 박사가 말한 다음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라마 카지 다와 삼둡은《티벳 사자의 서》에는 반드시 이 해설문과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이유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이나 북방불교의 특정 종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자들이 이 번역본을 잘못 해석하고 나쁘게 이용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해설문이 자칫하면 철학적 절충주의의 산물로 여겨져 비판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판 서문에서 고백한 대로, 이 긴 해설문을 쓴 것이나 경전에 수많은 주석을 붙인 의도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게《티벳 사자의 서》가 가진 독특한 철학과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경전의 내용에 정통한 자격 있는 입문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신비 세계에 입문한 스승들만이 이 경전을 해설할 자격을 갖추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27년대의 시대에 비해 2000년대인 현재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티벳불교(밀교)에 대한 어설픈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역자는 처음에는 트룽파본 그대로 옮기려고만 했다. 독송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금씩 번역을 하다 보니 티벳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자 역시 쉽게 들어오지 않는 대목이 많이 있음을 알았다. 아무리 독송용이라고는 하나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경전 원문의 경우 웬츠본의 주석을 찾아 많은 부분의 주석을 옮겨 달았다. 원래 웬츠본의 주석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벳어까지 표기하는 등 아주 세밀하여, 주석을 따라 다니다 보면 전문 학술 서적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다. 사실 그 점이 웬츠본의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재 학문적 엄밀성보다는 실천 수행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웬츠본의 주석을 옮기면서 독송시 꼭 알아야 할 부분만 간추려 실었다.


또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이《티벳 사자의 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록으로〈티벳 불교〉를 실었다. 이 글은 티벳 스승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8년간 티벳 불교를 공부한 후 80년대 초 송광사에서 5년간 선수행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스티븐 배?러의《연꽃 속의 보석이여》(심재룡 역, 불일출판사, 1989)에서 뽑은 글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티벳 불교 전반에 대한 스티븐의 명쾌하고 탁월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부분부터 잘 숙독하여 티벳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난 후 경전의 해설과 주석을 꼼꼼히 챙겨 보아야 한다. 자격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듣는다는 기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정독할 것을 권한다. 실제로 이《티벳트 사자의 서》를 독송할 때 경전의 원문에 나오는 주석을 보지 않아도 다 이해가 될 때 비로소 독송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해설〉부분은 원래 앞에 나와 있는 것인데 뒤로 순서를 바꾸었다. 처음부터 난해한 심리학적인 해설을 읽다보면 본문에 대한 흥미가 반감될 것 같아서였다. 처음에는 부록과 본문을 먼저 보고 난 후, 좀 더 깊이 들어가기를 바랄 때 해설을 보기 바란다. 처음에는 해설을 무시하는 것이 좋다. 본문 번역은 직역을 원칙으로 했지만 영어와 한국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특히 한글에는 없는 수동태의 빈번한 사용 때문에) 웬츠본과 서먼본을 참고하여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몇 몇 부분은 의역을 했다. 후일 더 나은 번역이 나와 이번의 미흡한 번역을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은 삶과 따로 분리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여 동전을 던져 버린다면 삶까지 던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삶에서도 자유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을 잊기 위해 눈앞의 현상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탐진치 삼독의 마약으로 자신을 잊고자 한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쓴 맛 뿐이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 왔지만 언제나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티벳의 스승은 말한다. 우리는 이 지구별이라는 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어서, 열심히 공부할 때만 다음 생에서 영적인 진화가 한 단계 오른 탄생을 갖게 된다고. 모든 것을 6근(根)을 통해 밖에서 찾는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마음 공부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 경전을 하루에 세 번 독송할 것을 권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독송해야 한다. 그것이 이 경전의 근본 뜻이다. 하지만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 사람이 현대 생활에서 하루에 세 번 독송은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경전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조용히 정좌하고 크고 또렷한 소리로 독송하기를 권한다. 그런 실천수행이 따르지 않고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만 대하는 사람이라면, 삶과 죽음의 친절한 안내서인《티벳 사자의 서》라 하더라도 결코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핵심요약....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삶을 그 뿌리부터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지닌 채 여러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죽음을 알지도 바라보지도 못한다.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는 너무나 무서움에 떤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뒤덮을 때, 두려운 나머지 우리는 무의식이 된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순간에는 누구나 의식을 잃는다. 그러나 만약 단 한번만이라도 죽음이 어떤 것인지 죽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다면, 다음 번에는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티벳 사자의 서(死者의 書)의 원래 제목은 티벳어로 〈바르도 퇴돌〉이라고 한다. 바르도란 둘 사이란 뜻으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사이를 말한다. 이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49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퇴돌이라는 뜻은 〈듣는 것을 통한 영원한 해탈〉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순간 오직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티벳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이 〈사자의 서〉에 익숙해 있다. 죽음의 순간에 그리고 육체적인 죽음 후에도 한동안 스승이나 영적인 선생은 그와 함께 한다. 그들은 사자(死者)가 의식적으로 남아있고, 그리고 더 낮은 단계의 통로에 이끌리지 않고 존재의 밝고 투명한 빛을 향하여 갈 수 있도록 살아있는 동안 들어온 이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체는 사자(死者)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이나 4일 동안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혹은 수면상태에 빠진다.

이 기간을 〈차카이 바르도〉, 즉 〈첫번째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최초의 투명한 빛과 두번째의 투명한 빛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사자는 세번째 빛의 단계인 〈초에니 바르도〉, 즉 〈두번째 존재의 본래 모습을 체험하는 바르도〉로 들어간다. 그가 기절상태에서 깨어날 때, 그의 눈앞에 상징적인 빛들과 소리, 그가 살아있을 때 행한 행위에 따라 카르마의 환영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자는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과 뼈가 있는 육체를 갖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육체를 찾아 환생의 길로 향하는 〈시드파 바르도〉, 즉 〈세번째 환생으로 향하는 바르도〉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카르마의 결정에 따라 이 세상이나 다른 어떤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바르도의 상태는 일종의 꿈의 상태이며, 다만 사자가 이것을 꿈의 상태인 것을 모르고 실제하는 체험이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 티벳 사자의 서는 이러한 바르도의 과정에서 사자가 의식을 잃지 않고 보여지는 모든 빛과 색채, 소리와 환영들은 모두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존재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영원한 해탈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osho-

▣ 중유신(中有身) 제도법(濟度法)

‘중유신 제도법’은 본디 밀종密宗에서 전하는 해탈법 가운데 하나다. 정토종의 제도법과 밀종의 제도법은 그 뿌리가 같다. 다만 밀법에서는 중유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현교인 정토종에서는 중유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제도법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음이 다르다 하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제도법 가운데 어떤 제도법이 이 말법시대에 적합한 제도법이 될 것인가?

밀법수행자는 지혜로운 근기가 있어야 하며 거기다 특별한 인연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金剛上師를 만나야 한다. 상사란 밀주密呪 를 전하는 이를 말하며 밀종에 귀의한 수행자는 이 주문을 날마다 염송해야 한다. 그러면 임종 때 밀주의 가지력으로 중유에 빠지지 않는다. 혹 중유에 빠진다해도 밀법의 힘으로 그 중유에서 빠져나와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참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는 봉황의 털보다 더 희귀하고 더구나 그런 금강상사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상사 없이도 한가지 밀주를 정해 놓고 수행할 수는 있겠으나 말법시대에 홀로 밀주수행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겠다. 거의가 죽을 때 중유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 시대에는 밀주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기에 그 가지력 또한 약하다는 말이다. 말법시대에 밀주를 수행하는 일이란 마치 도둑을 보고 입으로만 경찰을 부르는 것과 같다. 입으로만 경찰을 불러서는 도둑을 물리칠 수 없다. 도둑을 물리치려면 전화로 경찰을 불러야 한다. 지혜있는 이가 밀주를 수행함이란 이와 같다.

정토종의 염불문에는 조건이 없다. 어떤 사람일지라도 바르게 염불만 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정토에 갈 수 있다. 이것은 가장 간편하고 정확한 해탈법이다. 이 염불문 속에서는 지혜가 있는 이, 어리석은 이, 죄가 있는 이, 죄가 없는 이, 업이 가벼운 이, 업이 무거운 이, 남녀노소를 가릴 것이 없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중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염불하면 왕생하는데 이 책에서는 어찌해 중유의 세계를 설명하는가? 염불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인, 다른 종교인,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중유의 세계를 알려주고 그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가. 삶과 죽음

1. 왜 태어나는가?

죽음은 태어남에서 생긴다. 죽음과 태어남은 윤회하는 삶의 주된 특징으로 무명無明의 힘을 알맹이로 삼는다. 참으로 우리들의 삶이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꿈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이같은 무명의 파동이 겹겹이 일어나서 업業을 키워나가는 삶이 이뤄지고 있다.

무명에서 일어난 업의 삶은 컴퓨터의 기억장치처럼 삶의 모든 행동근거가 되어 버린다. 무명에서 일어난 업력은 ‘나와 맞다’또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같은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지어낸다. 그래서 근육, 뼈, 혈액 따위를 ‘나’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이 나를 보호하려는 맹목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사람들은 업력에 따라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미움 따위를 구별한다. 그래서 저마다 각기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업력이 같은 사람이 모이면 친근감이 생기고 업력이 다른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성글어진다. 이른바 정신없이 어지러운 ‘탁濁’이 생기는 것이다.

업력은 몸을 통해 최대한의 자기표현을 실현하고자 한다. 또 고집된 ‘나’로 하여금 이득이 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한마음으로 차차 눈, 코, 귀, 혀, 촉각신경과 생각하는 기능 같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어낸다.

이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형성되면 고집된 가짜 ‘나’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활동은 먼저 바깥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저마다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같은 바깥과의 접촉은 모태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교胎敎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접촉에 따라 여러가지의 느낌이 아주 민감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고 저항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격이 바뀌면 좋아하지 않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에 좋거나 나쁜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업력의 차이일 뿐이다.

무엇을 좋아하면 그것을 가지려는 행위로 이어진다. 소유욕이 그것이다. 가지려는 욕심도 소유욕이지만 갖지 않으려는 욕심도 소유욕이다. 중생은 이같은 방식으로 ‘나’라는 육체를 끝까지 소유하고 싶어서 가지가지 억지를 부린다. 이것이 중생의 삶이며 죽음은 이런 삶의 저편에 있는 것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던져준다.


2. 왜 죽는가?

중생의 삶이란 무명의 업력이 일으킨 파장이다. 그렇다고 중생의 삶이 업력 하나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업력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함께 해야 중생의 삶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태어남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불가사의한 만큼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경전에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천만겁을 헤맨다.”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움과 한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게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 때문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살생, 사음, 거짓말, 도둑질을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짐승이나 지옥처럼 만들어 죽으면 바로 그런 업의 힘에 따라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된다.

업력에 따라 받은 몸을 ‘보신報身’이라 하고 업력에 따라 받은 세계를 ‘보토報土’라 한다. 태어난 뒤로도 많은 조건들에 따라 업력이 변해가고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하면 죽게 된다. 사람마다 업력이 다르기에 목숨도 저마다 다르다. 목숨은 결코 신이 정해 준 것이 아니다.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는 매우 지당한 이치인 것이다.

중생은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생의 원인이 내생의 결과가 됨을 알지 못한다. 만약 삶의 진실을 깨달아 인과에 눈을 뜨지 않으면 윤회하는 삶의 괴로움은 태어날 때마다 이어질 것이다.

중생의 생명은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조건의 형성으로 태어나고 조건의 이어짐으로 생존하고 조건의 무너짐으로 쇠약해지고 조건의 없어짐으로 죽는다. 이것이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변치않는 네 가지 과정인 것이다.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면 살아가기에도 좋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일은 수행에 필요한 길이 된다.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무생無生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3. 죽음이란?

중생은 저마다 업에 따라 몸과 세계를 받는다. 사람들은 업력과 환경이 비슷하기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이같은 삶의 조건들이 사라지면 업력도 변하고 보고 듣는 세계도 바뀐다. 이처럼 업이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을 불교에서는 전류轉流라 한다. 현대과학에 빗대어 말하면 업력은 전파와 같다. 같은 세계에 태어난 중생은 이 전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사라지면 전파가 바뀌고 세계가 달라진다. 죽은 사람은 이제 더는 있었던 세계를 볼 수 없고 산 사람은 죽은 이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텔레비전 채널1과 채널2의 전파가 틀려서 채널에 따라 화면이 달라지는 현상과 같다. 중생은 지난생의 업력에 따라 새로운 몸과 세계를 받는다. 이같은 진실은 어떤 신의 이름을 불러도 바꾸어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어서 저마다 허상일 뿐이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태어남과 죽음과 관계에 대해 밝게 알아야 한다.

불법을 알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는 방법을 준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왜 불교도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않는가?’이런 말은 불법에 매우 어긋나는 말이다. 업력이 끝나지 않았다면 마땅히 과보를 받아야 한다. 과보를 받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오히려 나쁜 업을 짓게 되어 다음생에는 더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된다.

죽음을 맞는 준비란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과 그 끝을 알아 모든 생명이 다 거쳐 가는 과정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날마다 염불하면 업력이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죽을 때 윤회가 사라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염불수행을 정성스레 하면 스스로 죽을 날짜를 알 수 있고 병고가 없이 맑은 선정禪定 속에서 극락왕생 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염불에 인연을 맺지 못한 불자거나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이들이 죽음을 맞을 때 스스로를 구제하는 자기구제법을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구제법이란 비록 나쁜 내생의 길이 나타나도 그 길에 들지 않고 정토에 태어나는 특별한 법이다.

나. 사대(四大)의 흩어짐

1. 죽음의 전후


사람은 한 기간의 업보가 끝나면 절로 죽음을 맞는다. 불법을 수행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맞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음을 맞을 때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재산 때문에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한다. 설사 이같은 문제가 없고 매우 낙천적인 사람일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큰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면 여러가지 생리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종교를 믿었는가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가지가지 현상들이 보일 뿐이다. 살아서 십선十善을 베푼 이는 천상의 노래가 들리고 천인의 인도를 받게 된다. 또 악을 행한 이는 지옥이나 아귀 모습이 나타나 끝없는 괴로움을 받는다. 이같이 악을 행한 이들은 심한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불법으로 그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업력에 따라 삼악도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큰 선 또는 큰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면 죽을 때 며칠이나 몇주 동안 앓기도 하고 야차 맹수 원혼 같은 괴이한 형상을 보기도 한다. 이것 모두가 스스로의 업력이 불러온 것이다. 이때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어떤 이는 눈을 감으려 하지 않고,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욕하면서 보이는 괴물을 내쫓으려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고 사대는 흩어지게 된다.

2. 사대란?

사대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인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기운을 말한다. 이 네가지 요소는 우주법계에 없는 곳이 없기에 크다(大)고 부른다.

사람의 사대는 태에 들면서부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자라면서 사대는 강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이 때 사대는 무엇을 판단하는 기능을 지닌 가짜 ‘나’가 된다. 사람이 죽으면 사대가 흩어지고 인식작용도 사라진다. 다만 업력에 따라 또 하나의 생명을 가진 사대를 이루어 그 업력의 기능을 수행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는 이 점을 명심해서 사대의 허망한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3. 사대가 흩어짐


사대인 몸이 흩어질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지대에서 수대로 변하는 현상이다. 이때 죽음을 맞는 사람은 주위의 매우 강력한 압력이 몸을 짓눌러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은 모든 털구멍을 통해 스며들어와 내장과 뼈를 압박한다. 매우 극심한 질식감을 느끼며 큰 괴로움 속에서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옆에 있는 사람은 몸이 떨리고 손발에 경련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만지거나 안마를 해서는 안된다. 이같은 행동은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더욱 더 심한 괴로움을 줄 뿐이다.

다음은 수대에서 화대로 변하는 현상이다. 이때 온몸에는 심한 냉기冷氣가 느껴지며 뼈마디와 내장이 얼어붙은 듯한 괴로움이 오니 방안에 난로가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같은 괴로움은 알몸으로 얼음 속에 있는 것보다 더하며 얼굴빛이 회색으로 변하면서 호흡이 곤란해진다.

다음은 화대에서 풍대로 변하는 현상이다. 이때 죽는 사람은 몸의 기능이 다 되어 전혀 저항력이 없어 더욱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갑자기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불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내장과 사지에 스며들고 근육과 힘줄을 도려내는 듯한 괴로움으로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버린다. 불에 타는 듯이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마시는 숨 보다 내쉬는 숨이 길어지다 마침내 숨길이 멈춘다.

마지막은 풍대의 흩어짐이다. 갑자기 심한 바람기운이 죽는 이의 온몸을 몰아치며 몸이 조각조각 먼지로 흩어지는 극심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이쯤이면 사대가 흩어지고 근육이 무너져 의학적으로는 죽음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보면 이런 상태는 제8식이 아직 떠나지 않는 상태로 죽음이라 할 수 없다. 이때 친척들은 절대로 몸을 만져서는 안된다. 몸을 만지면 죽는 이에게 극심한 괴로움을 주어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삼악도에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는 사람은 나쁜 신 뿐만 아니라 천신天神이 나타나도 따라가지 말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죽음을 맞기 앞서 넉달이나 한달 또는 석주나 이틀 동안이라도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 염불행자는 죽을 때 아래와 같은 상서로운 현상을 경험한다.

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다.
⑵ 죽을 날짜를 뚜렷이 안다.
⑶ 온갖 집착이 사라진다.
⑷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 입는다.
⑸ 염불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⑹ 단정히 앉아 합장한다.
⑺ 평화로운 빛이 온 몸을 감싼다.
⑻ 미묘한 향기가 밀려온다.
⑼ 하늘의 음악이 들려온다.
⑽ 지켜보는 이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위의 상서 가운데 두 가지만 나타나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특히 두번째인 죽을 날짜를 알 수 있는 상서는 아주 중요하다.

4. 죽을 때의 다른 징후들

사람이 죽을 때 스스로가 살아온 삶의 습기인 선과 악이 모두 눈앞에 나타난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이는 아랫몸의 체온이 먼저 사라지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이는 윗몸의 체온이 먼저 식는다. 마지막으로 식게 된 곳이 얼굴인 이는 천당, 심장이면 사람, 배면 아귀, 무릎이면 짐승으로 태어나고, 발이 마지막으로 식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나 윤회를 벗어난 사람은 온 몸의 체온이 식어버리고 단지 머리 위에 따뜻한 기운만이 남아 있다.

가. 지옥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징후

⑴ 무서운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사랑하는 사람한테도 그런 얼굴을 한다.
⑵ 허공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고 한다.
⑶ 다른 사람이 좋은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⑷ 매우 슬프게 운다.
⑸ 똥오줌을 가리지 못한다.
⑹ 눈을 감고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⑺ 자주 얼굴과 머리를 가린다.
⑻ 옆으로 누워서 가래를 삼킨다.
⑼ 입과 온몸에 나쁜 냄새를 풍긴다.
⑽ 다리를 몹시 떤다.
⑾ 코가 옆으로 기운다.
⑿ 눈에 핏발이 선다.
⒀ 엎드려 눕는다.
⒁ 몸을 움츠리며 왼쪽으로 눕는다.


나. 아귀를 감응할 때 나타나는 징후

⑴ 입술을 자주 핥는다.
⑵ 몸이 뜨겁다.
⑶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무언가를 먹으려 한다.
⑷ 눈을 뜨면 감을 줄을 모른다.
⑸ 두 눈이 말라 버린다.
⑹ 오줌을 안 누고 똥을 가리지 못한다.
⑺ 오른쪽 무릎이 먼저 차가워진다.
⑻ 오른손으로 자주 주먹을 쥔다.


다. 짐승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징후

⑴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자꾸 보고 싶어한다.
⑵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추리려 한다.
⑶ 온 몸에 땀이 흐른다.
⑷ 목소리가 쉬어 버린다.
⑸ 입맛을 계속 다신다.


라. 사람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징후

⑴ 편안하고 착한 생각이 든다.
⑵ 몸이 아프지 않다.
⑶ 말이 그리 없고 부모 생각을 한다.
⑷ 배우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고 친척의 이름을 듣기 좋아한다.
⑸ 선악을 구별하고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⑹ 마음이 진실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⑺ 친척과 가족을 알아본다.
⑻ 친척들이 한 일을 칭찬한다.
⑼ 집안일을 당부하고 재산을 공개한다.


마. 천인을 감응할 때 나타나는 징후

⑴ 연민심이 생긴다.
⑵ 착한 생각이 든다.
⑶ 기쁜 생각이 든다.
⑷ 밝은 생각이 든다.
⑸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다.
⑹ 코가 옆으로 기울지 않는다.
⑺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⑻ 재산과 가족에게 미련이 없다.
⑼ 눈이 맑다.
⑽ 웃는 얼굴을 한다.


다. 중유기로 들어가는 전후단계

1. 임종


사대가 흩어지고 팔식이 몸을 떠나면 중유기中有期에 이르니 이때의 몸을 중유신中有身이나 중음신中陰身이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방황기다. 죽을 때 마지막 숨을 내뱉고 들이쉬지 않는다고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이때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울거나 만져서는 안된다.

이렇듯 죽은 듯한 상태가 얼마나 이어지는가는 죽는 이의 건강상태에 달렸다. 구멍에서 노란 액체가 나오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은 이가 아미타불을 염불하게 되면 큰 빛을 볼 수 있다. 이런 빛은 두번 나타난다. 영식이 몸을 떠나면 혼수상태에 빠지고 사나흘이 지나야 깨어나게 된다.


2. 중유신의 일반적 상황


중유신은 일종의 미묘한 사대로 이루어진 몸으로 생전의 아홉배에 이르는 기억력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이 스스로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장례를 치르는 친척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제서야 자신의 죽은 몸 곁으로 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한다. 어떤 중음신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없는 것을 보고 죽었다는 것을 알기도 한다.

이때 중음신은 무척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자마자 큰 괴로움을 느낀다. 중유신은 생전의 몸을 잊지 못해 자주 죽은 몸 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때마다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낄 뿐이다.

중유신은 이렇게 정처없이 방황한다. 잠시 쉬려고 하지만 중유신은 사람과 달리 목숨이 길지 못하다. 어떤 때는 생전의 몸이 그리워 집에 돌아가 보지만 몸은 이미 땅속에 있거나 불에 태워져 사라져버린 뒤다. 중유신의 괴로움은 더욱 커가고 끝내 중유신은 이같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다.

이때 중유신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바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중유신은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고 구원을 갈망하는 사이에 여섯가지 빛이 보이게 된다. 이 여섯가지 빛은 육도윤회의 빛으로 자기와 감응이 깊은 세계의 빛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늘세계는 흰빛, 사람은 노랑색, 아수라는 연초록색, 짐승은 연파랑색, 아귀는 연붉은색, 지옥은 검은 빛이다. 이 빛들은 약한 빛으로 큰 밝음이 없다.

만약 중유신이 이 여섯가지 빛 가운데 한 빛 속으로 빠져들면 윤회의 굴레를 쓰게 된다. 중유신은 이 빛들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오직 직감과 업력으로 빛을 선택한다. 이때 오방불계五方佛界에 계시는 부처님들이 윤회하는 삶들을 건지려고 다섯가지 빛을 뿌린다. 매우 밝지만 찬란하지 않은 파란빛, 청정한 흰빛, 곱고 부드러운 노랑빛, 고귀한 붉은빛, 맑고 성스러운 풀빛이 그것이다.

중유신이 이 빛에 따르면 바로 정토에 태어난다. 그러나 중유신은 스스로의 업력 때문에 이 빛을 두려워 하며 나아가 마계魔界의 빛으로 잘못알아 윤회의 길로 빠지고 만다. 이 부처님의 빛은 함께 나타나지 않고 하나씩 나누어서 나타난다.


3. 악업을 받는 징조

⑴ 짐승

중유신은 보통 이레에 한번씩 기절하여 다시 깨어난다. 극도로 불안해 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장례식에서 동물이나 집짐승을 죽여 만든 음식으로 대접하면 무서운 형상이 나타나 삼악도로 이끈다. 반드시 채식으로 상을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는 큰 괴로움을 당한다. 중유신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난다. 그렇지 않으면 업력에 따라 이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중유신의 몸은 아주 가벼운 깃털처럼 바람따라 정처없이 휘날리게 된다. 또 갑자기 맹렬한 빛과 함께 우렁찬 천둥소리가 터지고 손에 흉기를 든 무서운 야차가 끝없이 나타나고 무서운 맹수들이 쫓아오며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큰 불꽃이 쫓아 온다. 중유신은 겁에 질려 도망친다. 흰색, 검은색, 붉은색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높은 낭떠러지에 이른다. 야차와 맹수들은 계속 쫓아온다. 그때 홀연히 동굴이 보여 너무 기쁜 나머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동굴은 짐승의 세계다.

야차와 맹수와 소리와 불꽃은 생전에 지은 자신의 업력이 일으키는 환영이다. 흐린색, 검은색 붉은색은 업의 삼요소인 삼독이다. 중유신은 이같은 사실을 알고 흔들림이 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⑵ 아귀

아귀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귀의 삶은 온통 구부득고求不得苦로 가득하다. 중유신에게 이같은 악업이 있다면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나 동굴에 홀로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귀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보통 복덕이 있는 아귀와 복덕이 없는 아귀로 나눈다. 복덕이 있는 아귀를 세력귀勢力鬼라 부른다. 세상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가운데는 이 세력귀들이 끼어 있다. 야차, 산신, 토지신이 여기에 속한다. 생전에 보시를 하면서 가난한 이를 도왔으나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거나 남을 속여서 돈을 모은 이들이 세력귀로 태어난다.

복덕이 없는 귀신에는 소아귀小餓鬼, 다아귀多餓鬼, 전아귀全餓鬼의 세 종류가 있다.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남을 위해 베풀지도 않은 이는 소아귀로 태어난다. 소아귀는 얼굴이 검고 말랐으며 남색이나 붉은색도 있다. 눈에 눈물이 흐르고 손발이 부서지고 머리칼이 길어 얼굴을 가리고, 목마름이 심하나 자손이 제사지내는 음식이나 절에서 공양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다아귀도 소아귀와 비슷하나 소아귀보다 괴로움이 심하다. 전아귀는 완전히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입에서 불길이 나와 음식이 입에 닿자마다 타버린다. 거기다 배는 크고 목구멍은 바늘보다 가늘어 배고픔이 극심하다. 우란분회盂蘭盆會에서 공양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다. 만약 중유신이 이런 아귀와 감응할 징조를 느끼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⑶ 지옥

중유신이 살아있을 때 아주 나쁜 업을 지었다면 아래와 같은 현상을 보게 된다. 슬픈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그 음악소리를 따라가면 검거나 흰돌로 만든 집이나 동굴로 들어서게 되고 깜깜한 지하도를 건너게 된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질 징조니 중유신은 한마음으로 염불해야 한다.

또 어떤 중유신은 추운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을 보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불이 있는 곳으로 가면 불꽃지옥에 떨어진다. 거꾸로, 뜨거운 바람속에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나 그 바람 곁으로 가면 얼음지옥에 떨어진다. 중유신은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⑷ 아수라

아수라는 본디 좋은 세계에 들지만 자주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싸우는 것을 좋아하니 아주 좋은 세계라고 볼 수는 없다. 남자 아수라는 하늘사람들과 쉬지 않고 싸움을 하고 여자 아수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한다. 아수라는 비록 괴로움을 받지는 않지만 목숨이 다하면 삼악도에 떨어질 위험이 많다.

살아있을 때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지나치게 선악을 구별한 중유신은 중유기에 아름다운 숲을 보게 된다. 또 두개의 불바퀴가 나란히 도는 것을 보고 좋아서 가까이 가면 아수라로 태어난다. 이럴 때 중유신은 반드시 염불해야 한다.

4. 선업을 받는 징조

⑴ 사람

〈아함경〉에 따르면 인간계엔 네가지 세상 곧 사대부주四大部州가 있다. 동승신주, 남섬부주, 서우하주, 북구로주가 그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남섬부주 말고는 불법이 없다.

북구로주는 복과 목숨이 길고 향락에 빠지기 쉬운 곳으로 절대로 이곳에 태어나서는 안된다.

동승신주를 감응한 중유신은 아름다운 기러기들이 살고 있는 큰호수를 보게 된다. 이런 경치에 이끌리면 이곳에 태어난다.

남섬부주에 감응한 중유신은 심한 추위로 피할 곳을 찾게 되는데 업에 따라 큰집이나 작은 집을 만나게 된다. 만약 벽만 있는 집을 만나게 되면 가난한 이로 태어나게 된다. 이럴때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모든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우하주에 감응한 중유신은 소리가 풀을 뜯는 호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곳에는 여러가지 즐거움이 많고 오래 살 수 있으나 불법이 없는 곳이니 절대로 따라 들어가면 안된다. 중유신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앞서 남녀가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아버지를 가까이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여자로, 어머니와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일으키면 남자로 태어난다. 중유신은 자유로워 시공에 걸림이 없으나 한 번 어머니 배 안에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다. 남녀가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된 중유신은 한맘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해야 한다.

⑵ 하늘

살아있을때 착한 업을 쌓은 중유신은 중유기에 부드럽고 흰빛을 보게 되고 기분이 날아갈 듯 편안하다. 하늘세계와 하늘사람들을 보게 되고 마음이 기쁘다. 어떤 이는 죽을 때부터 하늘음악 소리를 듣게 되어 둘레에 모인 사람들에게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늘세계에는 여섯가지 종류가 있다. 저마다 갖가지 즐거움이 넘치고 목숨이 길지만 인연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길에 들게 되니 이같은 하늘세계에 끄달려서는 안된다. 중유신은 하늘세계나 하늘사람인 천사들을 보면 여기 끌리지 말고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 생生을 초월한 동반자 - 다르마

죽음이 덮쳐왔을 때, 이제까지 쌓아온 수행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면 죽음의 체험 자체를 명상의 과정으로 삼으면 된다.

죽음은 병을 얻어서 자연스럽게 겪는 수도 있고 돌발적인 사고 등으로 말미암아 급작스레 당하는 경우도 있다. 두 경우의 경험 과정은 같지 않다. 여기서는 병을 얻어 자연스럽게 겪는 죽음을 설명한다.

의사가 치료의 모든 노력을 포기할 때 부터 그 ‘경험’은 비롯된다. 건강한 사람은 입맛대로 변덕부리며 음식을 즐기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물 한모금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다. 너무 민첩하여 때때로 화(禍)의 뿌리가 되기도 했던 그의 혀와 입술은 이제 한 마디의 말도 구사하기 힘들다. 뻔질나게 걸치고 다니던 고급의복과 값비싼 패물도 무용지물이다. 따스함과 돋보임이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나 돌에 입히고 씌우는 것처럼 세상의 어떤 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못한다. 머리칼 한 올마저 다 버린 채, 그는 춥고 쓸쓸한 길을 혼자서 떠나야 한다.

숙달된 다르마 수행 습관이 유일하게 그를 도울 수 있다. 이제 그 이유를 명확히 인식한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힘껏 다르마의 수행에 몰두하겠다는 결심이 설 것이다. 죽음이 어느날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면, 당장 맞이할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수행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일을 치를 때 공포와 슬픔을 이기는 힘도 커지는 법이다. 평소에 실천해 온 명상을 조용히 반복하거나 일생동안 숭배해 온 붓다의 형상을 기억해 내어 상기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거나 귀한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하여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후회와 한탄 속에서 매우 산란한 마음으로 죽어갈 다르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죽음이 가까이 오면, 양팔과 양다리처럼 의식을 떠받쳐오던 네 가지 요소들이 힘을 잃는다. 육체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며 이윽고 육체에서부터 의식이 분리된다. 이 과정은 죽어가는 이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주위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바깥 징표(徵表)이고,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이 느끼는 내부적 경험이다.

몸의 네가지 요소 가운데 먼저 지대(地大:굳고 단단함을 성질로 하고 몸 전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바탕)의 힘이 시들어진다.

첫째, 몸의 전반적인 통제력이 멎는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여름 한낮에 아스팔트로부터 발산되는 뜨거운 기운과 같은 열기(熱氣)를 느낀다. 그 열기로 말미암아 수대(水大:축축함을 성질로 하고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말라간다.

첫째, 몸이 바짝 마른 나무처럼 되어간다. 피부는 빛과 색깔을 잃고, 입안과 눈의 물기가 사라진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엷은 안개가 천지를 뒤덮은 듯한 모습을 본다.

이제는 화대(火大:따뜻함을 성질로 하고 성숙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사그라 든다.

첫째, 몸이 차디차게 변한다. 머리에서부터 심장을 향하여 몸이 식어가는 사람은 바람직하지 못한 후생(後生)을 얻는다고 여겨진다. 반면에 심장부터 차가워 지기 시작하는 사람은 훌륭한 세상에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는 모습을 본다.

끝으로 풍대(風大:움직임을 성질로 하며 성장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사라진다.

첫째,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그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고통스러운 안간힘이 한참 계속되다가, 한 번의 긴 날숨(呼)을 마지막으로 그의 삶은 막을 내린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고요하고 어슴프레한 빛을 경험한다.

중음(中陰)의 상태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두려움과 환상이 모두 걷히게 되고, ‘자아(self)’에 대한 조잡한 인식도 없다. 생전에 명상의 수행을 숙달한 사람은 이러한 죽음의 과정을 겪는 동안, 조금도 당황없이 순간 순간을 찬찬히 음미하며 조용히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릴 것이다. 외부적인 삶의 징표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바로 처리해 버리지는 않는다. 죽는 자의 내부적 경험은 며칠 간 더 계속될 지 모르기 때문에, 당장 그의 시체를 묻어버리거나 장례지내 치우면 참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몸의 좌우에 있는 에너지 채널(nadis)이 몸의 중앙에 있는 에너지 채널을 단단히 죄어 에너지의 순환질서를 통제한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몸의 통제력과 좌우 에너지 채널의 옭아 죄는 힘이 상실되면, 중앙 에너지 채널은 자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달아난다.

이러한 점 외에 따로 징표는 없다. 이제 그는 달이 떠오르기 직전 하늘을 가로질러 퍼지는 희미한 빛과 비슷한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아 정수리의 차크라(cakra:정신 물질학적인 중심)에 지니고 있던 정기(精氣:white cell)가 심장의 차크라로 보내질 때 발생한다. 그가 다음에 보는 것은 해질녘 하늘에 퍼지는 노을과 같이 붉고 아련한 빛이다.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받아 배꼽 아래의 차크라에 지니고 있던 혈기(血氣:red cell)가 중앙에너지 채널(central radi)을 타고 심장의 차크라로 보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두 가지 기(氣)가 심장 차크라에서 만날 때 두 단계의 경험이 시작된다. 우선 칠흑같은 어둠이 닥쳐오고 그 자신은 완전히 의식을 잃는다. 깊은 무의식이 바다에 잠겨있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에게는 유리하다. 바로 다음 단계는 수행에 가장 적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모든 형체와 색깔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본다. 그러나 그 상태가 수냐타(sunyata:空)인 것은 아니다. 이 무렵의 의식은 미묘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상태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져가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므로 헛되이 소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탄트라의 수행을 깊이 한 사람은 이 미묘한 의식상태를 수냐타의 명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죵까빠(Tsong Khapa)도 다른 많은 성취자들처럼 이러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했다.

일반적으로 이 단계가 지나면 기(氣)는 흩어져 몸을 떠난다. 혈기는 콧구멍을 통하여, 정기는 요도(尿道)를 통하여 각각 빠져 나간다. 잠잘 때나 죽을 때 사자와 같은 자세로 누우면 이 두가지 징표를 볼 수 있다. 붓다가 인간의 몸을 버리실 때, 오른편 옆구리를 땅에 닿게 하고 누우신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심장 차크라를 떠난 의식은 곧바로 중음신(中陰身, bordo body)으로 들어간다.

이 중음의 상태는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하여간 그 속에 들어간 존재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과거의 행위로 말미암아 새로운 육신을 부여받게 된다. 윤회의 싸이클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다르마는 죽음의 경험을 자유를 얻기 위한 좋은 기회로 삼으라고 권한다. 다르마의 교훈을 실천하면 커다란 이익을 얻기 마련이고 이익의 정도는 개인의 수행능력에 비례한다. 최고도의 수행능력을 가진 사람은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고, 평범한 능력의 소유자는 수행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부여받고 재생하는 이익을 얻기도 한다.

이제까지 얘기한 명상의 힘을 키우려면 아래와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 좋다.

온 우주의 부처 님들께 기원합니다.
오직 한 번 뿐인 온전한 이 삶.
잠깐만에 부서지면, 다시 얻기 어렵거니
하찮은 일에 한눈 파는 일 없이
다만 이 삶의 진실한 모습
낱낱이 깨달아 마치도록 하소서."


▣ 죽음을 위한 가르침

죽음의 바르도(과도기, 중간시기)를 묘사하는데 자주 쓰이는 인상은, 아름다운 여배우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여배우는 이제 자기의 마지막 연극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그 여자는 무대에 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화장을 하며 제 모습을 살피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는 순간에 스승은 우리에게 가르침의 고갱이를 ─마음의 본성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다시 알려 주시며 우리 수행의 알맹이를 바로 일러 주신다. 스승이 자리에 없으시면 자기와 좋은 인연이 있는 도반이 옆에서, 가르침을 돌이켜 보도록 도와야 한다.

이 가르침을 일러주기에 가장 안전한 때는 감각이 다 멈추기 전에 소멸이 일어나고 있는 때지만, 가장 좋은 때는 바깥 숨이 멈춘 뒤와 “안 숨”이 멎기 전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마음의 본성을 돌이켜 볼 수 없다면 스승은 다시 죽어가는 이가 포와 수행을 잘 알고 있다면 그에게 포와 수행을 상기시킨다. 이 수행을 잘 모르면 스승은 포와 수행을 행하여 그 결과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미치도록 할 것이다. 그런 뒤에 스승은 죽은 뒤에 맞는 바르도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 그 경험이라는 것이 죄다 우리 마음의 투영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모든 순간마다 마음을 놓고 경험을 인식하라고 격려한다.

마지막으로 스승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깨끗한 부처님 나라를 기억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 곳에 태어날 것을 빌라고 일러 준다. 스승은 그곳으로 이끄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하고 리그파(마음의 성품)의 상태에 머물면서 죽어가는 이를 축복한다.


▣ 죽기 위한 연습

죽는 데는 다음 세 가지 연습이 필요하다.

1. 먼저, 마음의 성품에 안주하거나 자기가 해온 수행의 고갱이를 잊지 않고 지킨다.
2. 그 다음으로는 의식의 탈바꿈인 포와 수행을 한다.
3. 마지막으로 기도와 헌신, 열망, 깨달으신 이들의 축복에 의지한다.


▣ ‘포와’ 의식의 탈바꿈

이제 죽음의 바르도가 내게 뚜렷해지니,
내 모든 욕심과 바램과 매달림을 버리고
흐트러짐 없이 가르침의 뚜렷한 인식으로 접어 들어가리.
그리고 내 의식을 저 태어남 없이 리그파의 공간으로 몰아내리.
나는 이 살과 피로 된 몸뚱이를 떠나리니,
이 몸뚱이가 덧없는 환상인 것을 알게 되리.


“의식을 저 태어남 없는 리그파의 공간으로 몰아낸다.”는 것은 의식의 탈바꿈 곧 포와 수행을 말한다. 이 수행법은 죽음을 맞이할 때 가장 많이 행하는데, 죽음의 중간시기인 바르도와 관련된 특별한 가르침이다. 포와는 요가와 명상수행법으로 죽어가는 이를 돕고 죽음을 준비하는데 몇 세기 동안 써온 방법이다. 그 원칙은 죽어가는 순간에 포와 수행자가 자기의 의식을 몰아내어 그 의식을 부처님의 지혜 마음, 곧 파드마삼바바(연화생)스님이 “태어남 없는 리그파의 공간”이라고 부른 것과 하나로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수행은 개인이 몸소 하거나, 그 개인을 위해 자격있는 스승이나 다른 뛰어난 수행자가 해 줄 수 있다.

포와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수행자의 능력과 경험, 사람마다의 훈련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가장 많이 행하는 포와 수행은 “세 가지를 인식하는 포와”로, 우리 몸 가운데 경락을 길로 여기고 우리의 의식을 길가는 사람으로 여기며, 부처님 세계(불지, 佛地)를 갈 곳으로 여기는 것이다.

포와는 일과 가족에 묶여서 명상 수행을 오래 안 한 이들도 해탈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종종 일컫는다.

포와 수행에서 가장 중심되는 기원대상은 아미타불, 곧 끝없는 빛의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은 우리의 맑은 마음을 나타내고, 인간계의 주된 감정인 욕망의 변화를 상징한다. 죽음에 이르면 마음의 참된 본성은 빛의 새벽을 맞는 순간에 드러나게 될 것이나, 우리 모두가 그 참된 본성을 깨달을만큼 참된 본성과 가깝지는 않으리라….

죽음에 다달으면 우리 의식은 ‘바람’을 타게 되어 몸뚱이를 떠날 수 있는 틈이 필요하게 되므로 몸에 있는 아홉 구멍 가운데 어느 한 곳을 통해 몸을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의식이 빠져나가는 길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를 결정한다. 의식이 숫구멍, 곧 정수리로 빠져 나가면 정토에 태어나 점차 해탈할 수 있게 된다.

이 수행은 반드시 자격있는 스승의 지도 아래 행해야 한다. 이 수행을 마치는데는 아주 명석한 지식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믿음과 자비 한 곳을 생생하게 그리는 것, 아미타불이 앞에 계신다는 깊은 느낌이 있으면 된다. 이 수행을 연습하는 학생은 가르침을 받고 머리 꼭대기가 가렵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뚜렷한 유동체(流動體)가 나타나거나, 숫구멍의 둘레가 부풀거나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심지어는 숫구멍에 작은 구멍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수행을 얼마나 잘 했는지 알아 보려고 예로부터 풀 줄기 끝을 구멍에 집어 넣는다.

일본 과학자 히로시 모토야마 박사는 포와 수행의 정신생리학 효과를 연구했다. 뇌파전위기록장치(EEG)를 재 보니 포와 수행을 하는 동안 뇌파는 다른 명상을 하는 요가 수행자들의 뇌파와 아주 다르게 나왔다. 포와 수행은 두뇌의 시상하부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보통의 의식정신작용을 멈추게 하여 명상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보통 사람들도 포와 수행의 축복을 받아 강한 시각 경험을 할 수 있다. 부처님 세계의 평화와 빛을 얼핏 보고 아미타불을 보는 것은 죽음을 맞을 때의 경험과 비슷한 데가 있다. 죽음을 맞을 때 포와수행을 잘 하면 죽음을 대하여 안심을 하게 되고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죽음을 맞는 연습으로 하는 포와 수행은 아무 때나 위험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으로 내려오는 포와 수행에서 시간을 맞추는 것은 그야말로 중요하다. 보기를 들어 누가 자기가 자연스레 죽기도 전에 자기 의식을 진짜로 옮겼다면 그것은 자살과도 같은 것이다. 포와를 해야 할 때는 바로 바깥 숨은 끊어지고 몸 안쪽 숨은 이어지고 있을 때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소개할 소멸시기에 포와 수행을 시작해서 몇 번 되풀이하는 것이 아마 가장 안전하리라.

전통 포와 수행에 정통한 포와 스승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포와를 행하여 죽어가는 이의 의식을 눈으로 보듯 하여 숫구멍으로 끄집어 낼 때에는 반드시 알맞은 시간을 택해 너무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 하지만 포와 수행에 뛰어난 수행자는 죽음의 과정을 잘 알므로 경락이나 ‘바람’의 움직임, 몸의 열을 조사해서 포와를 언제해야 할 지를 알 수 있다. 죽어가는 누군가를 위해 스승을 청한다면 되도록 빨리 그 사람과 스승이 연결되어야 한다. 포와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효과를 낼 수 있다.

마음 상태가 좋지 않거나, 어떤 것에 대한 아무리 작은 바람이라도 든다면 죽음을 맞아 걸림새가 될 것이므로 눈꼽만한 나쁜 생각이나 갈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티벳에서는 짐승 가죽이나 털로 만든 것이 죽어가는 사람의 방에 있으면 포와를 성취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또 어떤 종류의 약품이든 연기를 내는 것은 가운데 경락을 막아서 포와를 더 어렵게 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덕과 수행이 모자라고 또 스승이 그를 위해 포와를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스승은 죽어가는 사람의 내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이 포와 수행은 죽어가는 사람을 더 나은 세계로 태어나게 도울 수 있다. 하지만 포와 수행을 잘 성취하려면 조건을 나무랄 데 없이 갖춰야 한다. 포와는 업이 아주 무거운 사람도 도울 수 있지만 그가 포와를 실행하는 스승과 가깝고 순수한 관계에 있고, 포와의 가르침을 믿으며, 그가 참마음으로 깨끗하게 되기를 청할 때만 가능하다.

티벳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의 가족들이 대개 라마들을 여러 명 초청해서 징후가 나타날 때까지 포와를 자꾸 행한다. 그 시간은 몇 시간이나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는데 이 시간은 주로 죽어가는 사람의 업에 따라 다르다.

티벳에서는 포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었는데, 그 징후는 누구나 볼 수 있게 드러나곤 했다. 때때로 죽어가는 사람의 숫구멍 둘레에 있는 머리카락이 왕창 떨어져나가기도 하고 정수리가 따뜻해지거나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지거나 보이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는 스승이나 수행자가 아주 뛰어나서 죽어가는 사람이 탈바꿈을 하도록 그들이 염불을 몇 구절 읊으면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기절하거나, 죽은 사람의 의식이 큰힘으로 몰아대는 바람에 머리에서 뼈조각이 튀어오르는 수도 있었다.


▣ 몸뚱이를 떠나기

우리 몸뚱이가 그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죽음을 맞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몸뚱이의 성품을 깨닫고, 우리를 매달리는 데서 가만히 놓아버리고 기

꺼이 몸뚱이를 두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이해하는 것을 오랫동안 한정하고 지배해 왔던 몸뚱이에서 마침내 풀려나면 한 삶의 업식은 다 사라지고 앞으로 일어날만한 업이라는 것도 구체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끝없는 가능성이 있는 ‘틈’, 또는 공간이다. 이것은 엄청나고 뜻깊은 힘의 순간으로,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얼마나 곧바르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마음의 본성을 이미 굳게 깨달았다면 한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업을 깨끗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굳은 깨달음을 이어간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본성의 근본이 되는 맑음을 넓힘으로써 우리의 업을 모조리 없애고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 책의 중요한 가르침....

1) 윤회계의 모든 존재들이 처한 상황과 장소와 조건들, 그리고 인간계와 천상계의 지옥계들은 모두 전적으로 현상에 의존한다.


2) 모든 현상은 윤회하는 마음에게만 나타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덧없는 것이고, 환영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 천신들이나 악마들이나 신령들이나 중생들과 같은 존재들은 사실 어떤 곳에도 없다. 이 모두는 원인에 의존한 현상일 뿐이다.

4) 이 원인이란 육체적인 감각과 변하기 쉬운 윤회의 삶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5) 이 원인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게 된다.

6) 사후세계는 그 조건만 다를 뿐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진 현상들의 연속이다. 이 두 세계는 똑같이 카르마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7)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 상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이 생에서 어떤 행위들을 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8) 심리학적으로 그것은 꿈의 연장이다. 꿈꾸는 자의 생각에 담긴 내용들이 곧바로 환영으로 나타난다.

9)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으면 카르마 법칙에 따라 천상계나 지옥계로부터 또는 바르도 세계로부터 곧바로 인간 세계에 환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10) 완전한 깨달음은 윤회계가 또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의 환영이며 실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깨닫는 데서 얻어진다.

11) 이런 깨달음은 어떤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12) 명상 수행, 다시 말해 '바른 지식'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도록 사념을 조절하는 수행은 필수적이다

13) 이 명상 수행은 스승 또는 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14) 이번 세계의 주기에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스승은 고타마 붓다이다

15) 그의 가르침은 그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죽음과 환생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윤회의 대양을 건너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해 아득한 세월 이전부터 수많은 붓다들이 인간세계에 폈던 것과 똑같은 가르침이다

16) 아직 환영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 세계나 다른 세계들에 존재하는 영적으로 더 많은 깨달음에 이른 보디사트바들이나 스승들은 자신들보다 뒤쳐저 도의 길을 걸어오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축복과 능력을 베풀 수 있다.

17)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계로부터 해방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다

18) 이 해방은 니르바나를 실현하는데서 얻어진다

19) 니르바나는 극락과 천상계와 지옥계와 그 밖의 모든 세계들을 초월한 경지이며, 윤회에서 벗어나 있다.

20) 그것은 온갖 슬픔의 소멸이다

21) 그것은 존재의 근원이다


관련도서./도서명 : 티벳 사자의 서
지은이 : 파드마 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출판사 : 정신세계사 펴냄

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 삼바바 지음 / 정창영 옮김
시공사


자료출처/http://blog.naver.com/neo99k/140005091506
bardo-147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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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1 10: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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