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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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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사마타 수행

 

앞쪽으로나 뒤쪽으로나

다른 누구도 발견할 수 없다면,

홀로 사는 님에게

아주 큰 즐거움이 생겨난다.

, 나는 홀로 가리라.

깨달은 님들이 칭찬하는 숲속으로

자신에 전념하는 수행승이

홀로 지내기에 즐거운 곳이다.

 

 

이것은 숲속에서 홀로 살기를 열망했던 어떤 왕자가 읊은 게송이다. (Thag. 10장 에까위하리야 537~546). 우리는 홀로 있고 싶을 때조차도 한 순간도 앞쪽으로나 뒤쪽으로 아무도 없이 혼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생 생활에서 고요함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산다. 어디에서나 시끌벅적하다.

 

 

그러나 우리가 부산해 하는 정말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다. 번뇌 때문이다. 우리가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중대한 범죄를 범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의 실수나 단점을 생각하면서 보낸다. 불선심은 몸과 마음에 다 해롭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친다. 우리는 겉으로 봐서도 들떠 있는 사람과 자애가 가득한 고요한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불선한 방식으로 말하는데 익숙해 있다면 즉각 우리 자신을 바꾸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불선심을 축적해 왔던가? 우리는 축적된 불선의 성향 때문에 선행을 하고 선하게 말하고 선한 생각을 하는 데 방해를 받아왔고 들떠 있고 불안했다.

 

 

보시, 지계, 수행은 불선심 대신 선심을 갖는 방법이다. 붓다께서는 보시, 지계, 수행 등 모든 종류의 선심을 계발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 주셨다. 선심이 있는 순간에는 탐, , 치가 없고 고요함이 있다. 우리가 스님들에게 음식을 주거나 경배할 때 고요함이 있다. 보시나 지계를 행할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과 담마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은 늘 할 수 있다. 보시나 지계는 지혜 없이도 할 수 있지만 수행은 지혜가 없으면 할 수가 없다.

 

 

담마의 연구라는 수행의 한 형태에 관해서 보자면 경장, 율장, 논장 등 삼장을 읽음으로서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담마를 연구하고 그에 대해서 심사숙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그것은 지혜와 더불어 하는 선심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의 삶이나 더 풍성하게 된다. 담마를 연구하면 바른 견해를 갖는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수행에는 고요함을 계발하는 사마타 수행과 통찰력을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목표와 방법이 다르다. 사마타의 목표는 고요함이다. 사마타에서 번뇌는 잠시 가라앉을 뿐, 근절되지 않는다. 위빠사나의 목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계발되는 지혜인 바른 견해는 번뇌를 뿌리 뽑는다.

 

 

사마타를 통해서 탐, , 치에서 잠시 자유로운 고요함을 계발할 수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얼마나 자주 불선심을 일으키는지 알면 선한 생각을 더 많이 계발하고 싶을 것이다. 사마타는 보시와 지계를 할 수 없을 때 선심을 계발하는 방법이 된다.

 

 

사마타는 높은 수준의 고요함을 닦는 방법이지만 수행방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선한 집중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숲 속에 홀로 있으면 고요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항상 선한 고요함이기만 할까?

 

 

선심 대신 집착,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마타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일어나는 마음들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는 불선심을 고요함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사마타에는 모두 40가지의 특정한 명상주제(깜마타나)가 있다. 어떤 주제가 고요함을 가져오는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이 마흔 가지 주제 가운데서 선택하지 않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진정한 선정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정의 특성과 명상주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사마타를 계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은 사마타가 어떤 주제에 대해 단지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집중하려고 하는 동안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 걸까? 우리는나의 집중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불선심이면 수행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선심일 때와 아닐 때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집중이란 무엇인가? 집중, 심일경성, 즉 빨리어로 에까가타 혹은 사마디는 각 마음에 동반하는 마음의 요소, 즉 마음의 작용이다. 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그 기능이다.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보이는 대상을 경험하는 마음인데, 이때의 집중이란 그 대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 , 치와 결합한 보고 듣는 어떤 마음이라도 이 각각의 다른 마음에 동반하는 심일경성의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집중이라는 마음 작용의 질은 그것을 동반하는 마음에 달려있다. 집중이 불선심에 수반될 때 집중도 역시 불선심이고 선심에 수반될 때는 집중 또한 선심이다.

 

 

사마타에 있어서 바른 집중이란 선정의 계발하는 데 대한 바른 견해가 있을 때만 생긴다. 선정이 있으면 선심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바른 집중도 동시에 있다.

 

 

사마타가 일상생활에서 계발될 수 있는가? 혹은 은둔생활을 해야만 하는가? 만일 더 높은 선정의 경지를 계발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듯이 특별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수준 높은 선정을 갖출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사마타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선정을 계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선정 수행의 40가지 명상주제 가운데 하나인 시체의 역겨움에 대해서 명상한다고 치자. 이 수행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각적 욕망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 모두 다 가끔은 죽은 사람이나 죽은 동물을 본다. 우리가 시체에 대한 명상에 관해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면 그것은 그런 모습을 봤을 때 혐오를 동반한 불선심 대신 선한 생각이 일어나는 조건이 된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는 붓다의 말씀이 생각날 수도 있다.

 

 

테라가타에 보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는 들뜬 사람이 나온다. 시체나 몸의 더러움에 대해서 명상하면 무상이라는 진리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꿀라품(Thag 393-398)에서 우리는 한때 감각적 쾌락에 탐닉했던 꿀라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붓다는 꿀라에게 시체를 버리는 곳에서 명상할 것을 권했다.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명상해서 꿀라는 어느 정도의 선정을 얻었다. 그렇게 얻은 선정을 바탕으로 지혜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다음 게송은 그가 얻은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다.

 

 

꿀라가 묘지로 다가가

여인이 버려져 있는데

시체를 버리는 곳에 버려져

벌레 먹혀 괴멸된 것을 보았다.

꿀라여, 병들고 불결하고

부패한 집적의 몸을 보라.

누설되고 유출되는 것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즐기는 것이다.

앎과 봄을 얻기 위하여

가르침의 거울을 붙잡고

이 몸이 안팎으로

공허한 것을 관찰했다.

 

 

꿀라는 진리를 깨달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시체나 몸의 더러움에 대한 명상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차라리 마흔 가지 명상주제들에 포함되는 불, , 승 삼보에 대한 회상을 하는 것이 낫다. 아니면 또 다른 명상주제인 지계와 보시에 대해서 회상하는 것도 괜찮다. 관용에 대해서 회상하면 우리는 관용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 셈이 된다.

 

 

청정도론(17107)을 보면 이 명상을 계발하려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이후부터 받을 사람이 있으면 단 한 입 분량이라도 먼저 보시하지 않고 먹지 않으리라그런 뒤 이같이 명상을 한다.

 

 

이것은 참으로 내게 이득이고 참으로 큰 이득이다. 나는 인색함과 때에 얽매인 사람들 가운데서 때와 인색함을 벗어난 마음으로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는 마음으로 살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고, 구걸하는 것에 반드시 부응하고 보시하고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 이렇게 명상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보시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관용이 없으면 이러한 명상주제에서 고요함을 가질 수 없고 보시에 대한 명상을 할 수가 없다.

 

 

무량심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있다. , , , 사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마음가짐이 명상주제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일상의 삶에서 자, , , 사의 특성에 대해 모른다면 어떻게 그 주제에 대한 명상을 계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기적인 관심사에 묶이지 않고 순수한 자애를 가지는 순간을 발견할지 모른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는가? 순수한 자애가 있는 순간과 집착이 있을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특성이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바른 견해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른 견해가 사마타에 필수적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만일 자애의 특성을 안다면 자애를 계발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선정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주제는 악의가 있는 생각 대신에 선심을 가지도록 우리를 돕는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또 다른 명상주제다. 호흡명상을 해서 선정을 계발하려면 그것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고 호흡의 특성을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호흡은 가장 어려운 명상 주제에 속한다. 호흡은 아주 미묘한 대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호흡이란 무엇인가? 호흡은 물질이며, 물질현상이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업, 마음, 온도, 음식(자양분)의 네 가지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호흡은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마음이 있는 한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 호흡이 있다. 우리는 모두 생명과 삶에서 즐길 만한 온갖 것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삶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생명은 일어나면 꺼지는 호흡이라는 물질에 의해 유지된다.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우리는 죽는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애착하던 것들이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 바른 견해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계발하면 번뇌로부터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하지만 호흡의 특성을 바르게 알아야만 한다.

 

 

청정도론(28197)에 보면 숨이 코끝이나 윗입술에 닿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나타난 곳에서 바로 사라진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려서 코끝이나 윗입술에 닿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것을 문지기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문지기의 비유는 이와 같다. 문지기가 도시의 안과 밖에 사는 사람들을 상대로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로 갑니까?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조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도시 안팎에 사는 사람들은 그 문지기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낱낱이 조사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들어간 들숨과 밖으로 나간 날숨은 이 비구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문에 도착하는 것은 모두 관여한다. 이것이 문지기의 비유다.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따라 다니면, 청정도론에 밝힌 바, 마음이 시끄럽고 동요하여서 흩뜨려질 것이다. 이 주제를 발전시키려면 방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호흡에 억지로 집중하려고만 한다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집중할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호흡 보는 것을 좋아하고 또 느낌을 이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이는 집착이지 수행이 아니다. 건강을 위해서 호흡운동을 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선정을 계발하려면 반드시 무엇이 수행인지 무엇이 수행이 아닌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수행주제의 목적은 선심에서 나타나는 선정이고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이 선심일 때와 불선심일 때를 정확히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선정이 있는 순간에는 집착이 없다.

 

 

호흡을 바른 방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지극히 어렵지만 바르게만 알아차리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없이 진정하게 고요할 수 있다. 그것은 호흡을 호흡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 물질로 여길 때 일어난다. 배가 움직이는 것을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호흡을 잘못 알아차리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주제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고요함으로 인도하는 많은 명상주제들이 있다.

 

 

사마타로도 위빠사나로도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다. 사마타로 알아차리는 것과 위빠사나로 알아차리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마타에서는 번뇌를 일시적으로 억누르기 위해 호흡을 알아차린다. 사마타의 알아차림의 대상은 육문에서 현재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을 어떤 것이라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의 대상과 같지 않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다 지혜가 있지만 사마타의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무아로 보지 못한다. 사마타의 지혜는 마음이 선심일 때와 불선심일 때를 분간해서 아는 정도다. 그리하여 사마타는 번뇌로부터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게 한다. 위빠사나의 목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에서 바른 견해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정신과 물질이 나타날 때 계발되어진다. 또 호흡을 알아차려서 고요함을 계발할 때 드러나는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무상과 무아로 알아차릴 수도 있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안다.

 

 

몇 가지 명상주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실행할 수 있다. 그것들은 선정을 이루는 조건이 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고요함, 즉 삼매의 수준에 다다를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고요한 마음에 동반하는 삼매 혹은 높은 수준의 심일경성이 있으면 삼매의 수준도 마찬가지로 높다. 사마디는 알맞은 조건이 있어야 계발되는 것이지 억지로 집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마타에는 세 가지의 발달단계가 있다. 준비단계 혹은 예비삼매, 근접집중, 그리고 선정심을 동반하는 본삼매. 준비단계 혹은 예비삼매에서는 마음이 수행주제를 알아차리고 있으나 선정심은 아니며 마음은 아직도 감각계(욕계)에 머물고 있다.

 

 

욕계 마음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마음인데, 예를 들어, 생각은 무언가를 원할 때 일어나는 마음이다. 근접삼매에 도달하면 선정의 수준은 높지만 마음은 아직도 욕계심이며 선정심이 아니다. 본삼매에 도달해야 선정심이 된다.

 

 

선정심에서는 명상주제에 몰입한다. 그 순간에는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또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번뇌로부터도 자유롭다. 선정심은 욕계심보다 높은 수준의 의식이다.

 

 

만일 사람들이 사마디의 여러 단계에 대해서 모른다면 선정심을 얻었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고 자신이 선정심을 얻었는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선정심은 지혜를 동반한다. 만일 의심을 한다면 지혜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선정을 계발할 의도가 없으면 사마디의 여러 단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유익하다. 과거생에 선정을 닦았거나 바른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삼매의 여러 단계 중 하나가 일어난다.

 

 

담마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집중이나 선정에 대해서 잘 모를 수가 있다. 바른 집중이 있고 잘못된 집중이 있다. 잘못된 방법으로, 예를 들어 탐욕을 가지고 명상주제에 집중하는 것은 잘못된 집중이다. 그들은 잘못된 집중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 선정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혹은 그런 경험을 닙바나를 성취한 걸로 여길 수도 있다.

 

 

선정에는 몇 단계가 있는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전 단계보다 더 미묘하고 세련된다. 미세한 물질계 선정인 색계 선정과 물질을 초월한 세계의 선정인 무색계 선정이 있다. 무색계 선정은 색계 선정보다 더 미묘하다. 무색계 선정심의 명상주제는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대상과 관계가 없다.

 

 

마흔 가지 명상주제 중 몇몇은 근접삼매에 이를 수 있다. 근접삼매 중 몇몇은 높지 않은 단계의 색계선정을, 몇몇은 드높은 단계의 색계선정을 이룬다. 색계선정에는 네 단계(다섯 단계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가 있다. 무색계 선정보다 미세하지 않은 색계선정의 단점을 본 사람들은 무색계 선정의 명상주제를 계발한다.

 

 

무색계 선정에도 네 단계가 있는데,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다.

네 번째 무색계 선정에서 상() 매우 미묘하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선정을 얻는다. 선정을 얻을 수 있도록 많은 방법들이 계발되어야 한다. 우리는 선정을 얻을 수 있는 조건과 방해하는 조건을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2128)을 보면 예비삼매와 근접삼매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선정을 얻어서 신통력을 계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와 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괴로워하거나 지루해 한다. 때때로 우리는 미래를 알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는 점쟁이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에 있는 별점을 보며, 그런 것은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점 같은 것에 중요성을 부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사들이 치유할 수 없는 병을 앓는 사람들은 의사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병을 치유한다고 주장하는 치유자를 찾아 간다. 우리는 점쟁이나 천리안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더 끌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며 번뇌를 가지고 있으며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서 삶과 죽음의 윤회를 계속해야만 한다. 마음에 집착과 악의와 어리석음이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은 오지 않는다.

 

 

붓다시대의 사람들은 아주 고요함을 얻을 때까지, 심지어는 신통력을 얻을 때까지 선정수행을 했다. 색계와 무색계 선정의 높은 단계까지 얻고 각 단계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얻은 사람들은 신통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힘을 계발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선정을 얻은 사람 중 아주 극소수만이 이런 힘을 발전시켰다. 사마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신통력은 다음과 같다. 허공을 난다든가 물위를 걷고 땅 속에 들어가는 신족통, 천이통,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타심통, 전생을 아는 신통인 천안통(천안통이 있으면 전생이나 존재의 재생을 알 수 있다) 등이다.

 

 

사문과 경(D2)에서 부처님께서는 마가다의 왕에게 신통력을 가진 은둔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는 위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신통변화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하나인 채 여럿이 되기도 하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고 벽이나 담이나 산을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합니다. 땅에서도 올랐다가 잠겼다가 하기를 물속에서처럼 합니다. 가부좌한 채 허공을 날아가기를 날개달린 새처럼 랍니다. 저 막강하고 위력적인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심지어는 저 멀리 범천의 세상에까지도 몸의 자유자재함을 발합니다.(D2: 87)

 

 

불교에서 우리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배운다. 어떤 일이 일어날 만한 조건이 생겨서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충격을 받는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일어날 만한 조건이 있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 특이한 현상이라고 해서 놀라지 않는다. 목갈라나, 아누룻다, 그리고 다른 몇몇 제자들은 신통력을 가졌지만 그러한 현상들이 단지 조건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신통력을 가진 것이 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마타는 높은 수준의 선업이며 선과보를 가져온다. 사마타는 사람들을 더욱 더 고요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번뇌는 사마타에 의해서 뿌리 뽑히지 않는다. 비록 선정 수준의 고요함에 이르러도 마찬가지다. 또 신통력이 있어도 번뇌를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부처님도 구도자 시절에는 사마타를 닦았으나 위빠사나를 계발하여 마침내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

 

 

율장 빠라지까 I, 1, 4에서 우리는 부처님이 웨라냐 브라만에게 깨달음을 얻은 밤 세 번의 목격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마타를 통해 계발된 신통력으로 자기의 전생을 봤다. 두 번째는 신통력으로 존재들의 전생과 재생을 봤다. 세 번째는 번뇌가 제거되어 붓다가 된 것을 본 것이다.

[참고]율장의 빠라지까 품은 바리이죄라고 하는 큰 계를 범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리하여 마음이 집중되어...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을 아는 것으로 향하도록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알았다. 이것은 괴로움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니 내 마음은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존재를 생성하는 번뇌로부터 지유로워 졌으며, 사견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어리석음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내가 해탈하자, 해탈했음을 알게 되었으며 재생은 끝났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할 일은 다 마쳤으며 더 이상의 경지는 없다. 이것이 브라만이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은 밤에 세 번째 목격한 것이다. 무지는 소멸되었고 앎은 일어났으며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이 찾아왔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물질과 정신이 나타나는 순간에 그 특성을 알아차리지 않는다면 물질과 정신이 곧 괴로움임을 어떻게 알겠는가? 오직 이렇게 할 때만 무상, , 무아를 알 것이다. 이런 지혜만이 번뇌를 소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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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0 07: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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