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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삶

 

삶속의 불교.jpg

 

10장 삶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근원은 무엇인가? 삶은 언제, 어떻게 끝나는가?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계속 해왔던 질문이다. 삶이란 현재순간의 정신과 물질이다. 지금 보고 있다; 이게 삶이 아닌가? 본 것 때문에 집착, 화냄, 무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게 삶이 아닌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본 것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삶이 아닌가?

 

 

, , , , , 마음; 우리는 이 여섯 문을 통해 대상을 경험한다. 그리고 경험한 것 때문에 번뇌를 일으킨다. 이것이 현재순간의 삶이며 이것이 과거의 삶이었고, 미래에도 삶이 될 것이다. 번뇌가 끝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끝없이 이어지는 존재들에게 시작은 있는가? 우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조건 지어졌는가를 알고 싶으면 현재 우리 삶을 조건 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할 때 어리석음이 있는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가? 형상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접촉한 사물이나 마음의 문을 통해 경험한 대상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살 만한 조건이 있으면 삶은 계속 된다. 삶은 무지와 갈애로 조건 지어져 있다.

 

 

위대한 여섯 감각장소의 경(M149)에 보면 부처님께서 사와티 부근 제따 숲에 머무실 때 비구들에게 한 말씀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눈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형색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눈의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눈의 감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 눈에 집착하고 형색에 집착하고 눈의 알음알이에 집착하고 눈의 감각접촉에 집착하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한다.

그가 집착하고 얽매이고 미혹하고 만족하게 여길 때 미래의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가 쌓인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증장한다. 그에게 육체적 불안이 커지고 정신적 불안도 커진다. 육체적인 고통도 커지고 정신적인 고통도 커진다. 육체적인 열병도 커지고 정신적인 열병도 커진다. 그는 육체적인 괴로움과 정신적인 괴로움을 겪는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제1 원인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맨 처음 어리석음은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 첫 번째 원인이 무엇인지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목표인 번뇌를 제거하는 것에 인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어리석음이 있다. 그것은 실재다. 그것은 과거의 무지에 의해서 조건 지어져 있다. 만일 그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미래에도 영원히 어리석을 것이다. 삶은 바퀴와 같다. 시작도 없이 빙그르르 돌 뿐이다.

 

 

우리는 어느 존재계에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삶은 너무나 짧고 꿈과 같다. 우리는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며 많은 번뇌를 축적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서 번뇌가 어떻게 축적되었는지 알아낼 수는 없다. 과거의 사람들도 또한 번뇌를 지녔다. 자기 전생을 기억하고 번뇌를 어떻게 쌓아왔는지 아는 사람도 있다.

 

 

 

이시다시 장로니의 게송(Thig. 400-447)에 남편을 여럿 가졌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만족할 수 없었던 이시다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이시다시는 비구니가 되었고 후에 아라한이 되었다. 이시다시는 전생을 회상할 수 있었는데, 자기가 그렇게 큰 슬픔을 가진 것은 전생에 간통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불선업 때문에 이시다시는 오랫동안 지옥에 재생했고 동물로도 세 번이나 재생했다. 인간으로 세 번 재생한 후 커다란 고통을 겪다가 결국 아라한이 되었다.

 

 

인생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의 연속이다. 인생에서 우리 모두가 겪는 슬픔은 그러한 조건이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빠따짜라 장로니의 게송 (Thig. 112-116)에 보면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하루만에 남편과 두 자식과 부모를 잃은 빠따짜라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처음에 슬픔으로 미쳤으나 극복할 수 있었다. 수다원이 되고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빼앗긴 여인들을 위로했다.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는 알지도 못하니

그 뭇 삶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는 나의 아들이라고 울부짓는다.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가 알더라도

그것을 슬퍼하지 마라

뭇 삶의 운명이 그러할 뿐이다.

 

청하지 않았는데도 이곳에 와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서 떠났다.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며칠 동안 지내다가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간다.

 

죽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는 윤회하며 갈 것이리라.

오는 것처럼 갔으니,

거기에 어떠한 슬픔이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어느 존재계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과거 삶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따라서 그 삶의 과정에서 부모, 형제, 자매, 자식 등 여러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하기를 원하는가? 마하 빠자빠띠 고따미 장로니의 게송(Thig. 157-162)를 보면 번뇌를 모두 제거한 빠자빠띠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의 괴로움은 완전히 알려졌고

원인인 갈애는 말라버렸고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은 닦여졌고

적멸은 나에게 실현되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어머니이자

자식이자 형제이자 자매였으나,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하며

죄를 씻지 못하고 윤회해왔습니다.”

 

저 세존을 내가 친견했으니,

이것이 최후의 몸으로,

태어남으로 인한 윤회는 부수어졌으니

이제 다시는 윤회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과거생에서 조건 지어졌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경향들 역시 과거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들은 과거에도 하던 것들이다. 우리는 붓다께서 과거에 행했던 것과 비슷한 우리 자신의 행위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과거생을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겁 이전부터 번뇌를 축적해왔다는 것을 안다.

 

 

번뇌라는 말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우리는 어쩌면 오로지 약간의 결함과 단점에 의해서 망쳐진 순수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런지 모른다.

번뇌낄레사라는 빨리어를 번역한 용어다. 낄레사는 더러움, 불순함 등을 말한다. 우리가 자신의 번뇌를 더 잘 알면 번뇌가 가져올 비탄과 슬픔을 더 잘 볼 수 있다. 우리는 번뇌의 위험을 볼 것이고 번뇌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얼마나 근절하기 어려운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번뇌와 악의, 무지로 가득 차 있다. 번뇌가 소멸하면 슬픔이 덜해진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각기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하나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가 다르며, 그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각기 다르다. 붓다시대에나 오늘날에나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명한 사람도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이나 사물에 집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집착하지 않으면 진짜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지 때문에 그들은 인생의 원인과 결과를 보지 못한다. 즐거운 경험을 할 때 그것들은 오로지 과보의 순간일 뿐이며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전에 행한 행위 때문이며, 진정한 원인은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남을 비난한다.

 

 

마음이 초조한 사람이나 우울한 사람과 일상생활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도피를 시도한다. 영화를 보면서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고 술을 마시거나 약물에 중독되어 마치 다른 세계, 다른 사람이 된 듯이 느낌으로서 만족을 얻는 사람도 있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들은 무지 속에서 살아간다.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거나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생이 무지와 갈애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번뇌의 종식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번뇌가 슬픔을 가져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번뇌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보시, 지계, 수행을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일상생활에서 번뇌를 근절시키는 지혜를 계발한다. 그들은 현명한 사람들이다. 장로게와 장로니게를 보면 붓다 시절의 많은 여자와 남자들이 오늘날 사람들과 같이 두려움과 분노와 싸우면서 힘들어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번뇌가 많았지만 팔정도를 따름으로서 번뇌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라고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생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현명한 사람들은 번뇌를 종식시키는 데로 인도하는 방법을 계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행하기를 주저한다. ‘마땅가붓따게송(Thag. 231-233)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너무 춥고 너무 덥고

너무 늦다고 이와 같이 말하니

일을 팽개쳐 버린다면

찰나가 젊은 학인을 지나친다.

 

추위와 더위를

잡초보다 더한 것이라 여기지 않고

장부가 해야 할 일을 행한다면

안락에서 멀어지지 않으리.

 

 

알아차리기에 너무 춥거나 덥거나 늦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항상 현재를 알아차리기보다 다른 것을 하고 싶어 한다. 감각을 통해 즐기는 것을 인생의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는가? 인생의 목적이 부나 육체적 안락이나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을 잊었는가?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을 무상하다고 본다.

 

 

이발사에게 머리 손질을 하던 위따소까(Thag. 169,170)가 거울에 비친 자기 흰머리를 본 장면이 나온다. 그것을 보고 그는 실재를 상기하여 통찰력을 계발했다. 그는 이발하려고 앉아 있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이발사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내가 거울을 들어서

내 몸을 자세히 관찰했다.

 

나의 몸이 공허한 것이 드러났다.

암흑 속에서 어둠이 사라졌고

일체의 피복(被覆)이 제거되었으니

이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가장 잘 드러난다. 그것을 보면 무상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할 때조차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알아차림을 계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의 일들이 알아차림을 방해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정신과 물질은 여섯 가지 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음식을 준비할 때도 통찰력이 계발될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데리가따 장로니의 게송(Thig. 1)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여인이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꽃에 음식이 탔다. 그 순간 그 여인은 조건 지어진 것의 무상함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아나함이 되었다. 나중에 비구니 승가에 들어가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깨달음을 선언했다.

 

 

조각천으로 만들어 입었으니,

데리까여, 잘 자라.

옹기 속의 마른 야채처럼,

그대의 탐욕은 실로 지멸하였다.

 

 

너무 뒤숭숭하고 불안해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붓다시대의 사람들도 많은 번뇌에 압박당하고 강박관념 때문에 괴로웠다는 사실을 알면 좀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라고 해서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마 장로니의 게송(Thig. 37-41)에 보면 감각적 욕망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던 한 비구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여인은 담마디나에게서 담마를 배웠으며 6가지 신통을 얻었다. 여섯 번째 신통은 번뇌가 다한 누진통이다. 이러한 내용이다.

 

 

내가 출가한 지 어느새

스물다섯 해가 지났지만

손가락 튀기는 시간만큼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마음의 평온을 얻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젖었으니,

팔을 내저으며 울면서

나는 승원에 들어왔다.

 

믿을 만한 수행녀에게

내가 찾아갔는데

존재의 다발과 감각의 영역과 인식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으니

전생의 삶을 알았고

하늘눈은 청정해졌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앎과

하늘귀가 맑아졌고, 신족통이 실현되었고

일체의 번뇌가 부수어졌으니

여섯 가지 바른 앎이 이루어졌고

깨달은 님의 교법이 실현되었다.

 

 

다섯 가지 힘 혹은 지혜란 신통력을 말하는데, 천상과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 먼 거리를 가까운 듯 빨리 갈 수 있는 신족통,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타심통, 존재의 재생과 죽음을 보는 천안통, 전생을 기억하는 숙명통 등이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만큼 분노에 압도된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할 수도 있다. 부처님 시대의 사람들도 현대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희망을 모두 잃은 사람도 슬픔과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다. 씨하 장로니의 게송(Thig. 77-81)에 보면 자살하려던 비구니 이야기가 나온다. 죽으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지혜가 무르익어 아라한이 되었다. 다음 게송을 보자.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탐욕에 괴로워했고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예전에 나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오염에 사로잡혔으니

아름다운 인상을 따르고

탐욕의 마음에 종속되어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여위고 창백하고 추하게

칠년 동안 헤매었다.

밤이나 낮이나 심히 괴로웠으니

나는 결코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밧줄을 들고

나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비참하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나는 목을 매겠다.‘

 

단단히 밧줄을 엮어서

나뭇가지에 묶고

목에 올가미를 걸었는데

그때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다.

 

 

부처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 읽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모두 탐진치를 축적하고 있으며 번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열반은 너무 멀리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에 대해 올바로 알아차릴 때마다 바른 견해가 계발된다. 그리하여 사견이 제거되고 깨달음을 얻는다.

 

 

말룽끼아뿟따 장로의 게송(Thag. 794,5)에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중에 아라한이 된 말룽끼아뿟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란된 알아차림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을 탐착하고 만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운다면

그에게 열반은 멀다고 하리

 

 

(다른 감각 인상에 대해서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형상을 보면

형상들에 매혹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상을 보더라도

이렇게 새김을 확립하고 지내면

느낌을 경험하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다면

그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Thag. 806,7)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그 사람의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 난다 장로의 게송(Thag. 157,8)에 아라한이 된 난다 이야기가 나온다.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치장에 전념하였으니

나는 교만했고 경박했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고통을 당했다.

방편에 밝은 부처님

태양의 후예 아래서,

나는 이치에 맞게 수행하면서

존재에서 마음을 건져냈다.

 

 

붓다 시대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을 계발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찌마 니까야 주석서 빠빤짜 주다니의 대념처경 부분에 부처님이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꾸루 지방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꾸루 지방에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 심지어는 노예까지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다. 바른 견해를 계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과 같다.

 

 

담마를 모르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삶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고 미래에 대한 견해도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온 힘을 바쳐 행복한 재생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영원한 축복이 있는 천상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후의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전쟁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 불협화음도 없는 이상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담마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세계란 게 무상하다는 것을 안다. 이 세계는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다시 조건에 의해 사라진다. 세계는 일어났다가 와해된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진리를 가르치는 붓다가 태어난다. 그러나 그 가르침조차도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번뇌 때문에 가르침을 곡해하고 오염시킨다. 현대인들은 담마를 들을 수 있고 팔정도를 계발할 수 있다.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가장 유익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바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다. 붓다는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수행을 가르쳤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도 있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둘 다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할 것이다. 형상의 세계, 소리, 냄새, , 감촉의 세계, 의식의 세계 등 여섯 가지 세계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러한 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안다. 붓다는 이 모든 세계를 모든 방면에서 각각의 양상으로 분명하게 알았다. 이것을 세간지라고 한다.

 

 

갈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재생이 끝나면 괴로움이 끝난다는 것을 모른다. 조건 지어진 것들의 무상을 보면 갈애가 단계적으로 제거된다. 아라한은 더 이상 생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생이 끝나게 될 것이다. , 정신과 물질이 끝나면 다시 일어나지 않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어진다. 아라한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이고 진실한 평화임을 알았다.

 

 

아디뭇따(Thag. 723-725)에 보면 아디뭇따라는 아라한이 강도들에게 공격을 당했으나 평온을 유지했기 때문에 강도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디뭇따가 말했다.

 

 

그 분은 멸진으로 이끄는

위없는 진리를 가르쳤으니,

그 가르침에 의해서

나는 근심의 여읨을 얻었다.

 

선인의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도적들은 칼과 무기를 내려놓았으니

어떤 자들은 그 일을 그만두고

어떤 자들은 출가를 선택했다.

 

출가해서 행복한 님의 가르침 가운데

깨달음의 고리와 힘을 닦은 슬기로운 님들은

마음이 승화되고 고양되고 능력이 단련되어

조건 지어지지 않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다.

 

 

무지와 집착은 인생을 조건 짓는다. 무지와 집착이 뿌리 뽑히면 더 이생 태어날 조건이 없다. 태어나지 않으면 괴로움이 없다. 앞에서 인용한 여섯 가지 감각의 위대한 경(M149)에서,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몸과 마음에서 괴로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다음은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다.

 

 

비구들이여, 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형색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알음알이를 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에, 눈에 집착하지 않고 형색들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미혹하지 않고 만족하게 여기지 않을 때 미래의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가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향락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제거된다. 그에게 육체적인 불안이 제거되고 정신적인 불안도 제거된다. 육체적인 고통도 제거되고 정신적인 고통도 제거된다. 육체적인 열병도 제거되고 정신적인 열병도 제거된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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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 18: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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