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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대념처경 강좌 <서언7>

대념처경.jpg

 

모든 것은 일어날 조건이 있어서 일어납니다.

일어날 조건이 없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가 있어서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번뇌가 없으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욕이 있어서 성냄이 일어납니다.

탐욕이 없으면 성냄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지가 있어서 탐욕이 일어납니다.

무지가 없으면 탐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지가 있어서 무지가 일어납니다.

지혜가 있으면 무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다시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며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역시 여기서도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과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똑같이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다른 것과 섞이지 않아야 하며,

나의 마음이 아닌, 단지 아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을 단지 마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른 여러 가지의 마음과 섞여서 불선심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불선행을 하고 불선 과보를 받아

윤회를 하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에서는 약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 보이지 않으므로,

있는지 없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추론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첫째, 대상, 지배, 함께 생김, 세계, 법, 과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등등의 분류에 따라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문적으로 알아차리려면 지혜가 나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결국 이런 지혜를 알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무상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알아야 할 마음들이 있습니다.

 

셋째, 아비담마에 나오는 세부적인 설명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

갈애와 함께 하는 마음 등등 여러 가지 분류가 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도 전문적인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수행자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더 깊은 지혜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말하는 ‘세상에 대한’ 이란 ‘마음에서’ 라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 매 순간 여러 가지 형태의 마음들을 알게 됩니다.

 

마음은 매 순간 변하면서 흐릅니다. 그 때마다 각기 다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을 것이며,

알아차림이 있을 때에는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있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을 때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반대로 관용이 있을 때는 관용이 있는 마음을,

자애가 있을 때는 자애가 있는 마음을,

지혜가 있을 때는 지혜가 있는 마음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간교한 마음과 무지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다시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그렇습니다.

법을 알아차릴 때 역시 몸과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과 똑같습니다.

 

법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법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법을 마음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대상으로써의 법이 집중력이 생기면 지혜로 본 대상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와 열반을 성취하는 궁극적 진리를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될 대상은 먼저 몸입니다.

그리고 느낌입니다. 그리고 마음입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느낌으로 알아차릴 때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법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법이 없으면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법답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해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대상에 휩쓸려 버리면 이것은 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입니다.

 

대상으로서의 법이 진리의 법으로 바뀔 때 비로소 수행의 완성도를 더해 갑니다.

이러한 법의 끝에 열반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에 대한’ 이란 말은 ‘법에서’ 를 뜻합니다.

정신과 물질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대상이며

이것을 ‘세상에 대한’ 이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대상과 아는 마음과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알아차림이란

세 가지 요소가 성숙되어야 합니다.

 

뒤에 법념처에 가면 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법념처에서 다루는 법은 다섯 가지 장애와 오취온과

십이처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인 칠각지가 있고

마지막으로 고, 집, 멸, 도 사성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부입니다.

 

수행자가 어떤 대상이 나타나거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법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나타난 모든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알아차릴 대상일 때라야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로 바뀝니다.

그리고 무지한 상태에서 지혜가 있는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 신, 수, 심, 법 사념처라는

네 가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상 대념처경의 서막을 여는 서언을 공부하시면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동일한 문장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대념처경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에서도 이와 동일한 말이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500년 전부터 시작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불가피한 과정에서 생긴 결과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없어서 암송을 하고,

그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동의어가 반복됩니다.

수많은 말씀을 모두 외워 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양식의 문장에 다른 내용의 문자를 넣어서 암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같은 말들이 반복되는 것이 싫어서 필요한 말만 골라서 읽거나 외운다면

경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고자 하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대념처경의 서언(序言)과

서언에 대해 주석한 내용들을 들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대념처경에 대한 법문을 들으실 때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부처님의 말씀과 함께

주석서에 적힌 내용을 보충해서 들으시겠습니다.

여기서 참고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가 있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상류계급이 사용하는 언어였고

빨리어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당시의 산스크리트어는 문자가 있어서 기록을 할 수 있었고,

빠알리어는 문자가 없고 말만 있을 뿐이어서 기록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귀족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서민들이 사용하는 빨리어로 법문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빨리어로 전법을 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빨리어는 문자가 없어서 1차 경전 결집을 통하여 모여진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하여 암송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암송을 하기 위해 비구들이 경전 결집을 하는데 몇 년씩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 오백년이 지나서 스리랑카에서 빨리어로 암송되던 부처님의 말씀이

싱할리어로 야자수 잎에 최초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패엽경’ 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최초의 경전 형식입니다.

 

싱할리어로 기록된 경전이 다음에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고

다시 한문이나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인 로마자로 번역된 것도 그 중의 하나이고

현재 우리말로 번역된 것도 한글 빨리어 경전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경전에는 ‘빨리어’ 라는 것이 반드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경전 내용이 모두 그대로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유사하게 번역된 경전이 있고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경전도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어가 아니면 부처님의 원음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얼마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경전마다 다르므로

그것은 여기서 밝힐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좌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장’은 아난다 존자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빨리어 경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장’은 우빨리 존자에 의해 암송된 것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논장’은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설하지 않으셨지만

사리뿟따 존자에게 전해진 것이 그대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뜻이 변하지 않고 2,500년 동안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주석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빨리어 경전이 암송되기 위해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반복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수행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학습의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반복되는 형식이 경전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방법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비구들에 의해 경전이 암송되는 것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전의 내용을 틀리지 않게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부주의하게 문자 하나만 틀려도 내용이 달라지는데

여러 비구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암송을 하면 내용이 바뀌지 않고 정확하게 계승되어서

전달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5세기 초에 ‘붓다고사’ 가 ‘청정도론’ 이라는 주석서를 쓸 때

여러 비구들에 의해 검증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상좌 불교에서는 포살을 할 때나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할 때

과거부터 전승되어 온 방법 그대로 빨리어 경전을 암송합니다.

‘빠타나’ 라고 하는 24연기에 대한 경전을 암송할 때는

24시간동안 교대로 쉬지 않고 일주일 씩 보름 씩 계속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빨리어 경전을 읽거나 들을 때 이런 역사적인 과정에 의해 불가피하게

동의어가 반복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셔야 하겠습니다.

같은 말이 되풀이 되더라도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을 수 있는 통로로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오랜 역사를 뛰어넘어

수많은 아라한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깊은 내용을 더 간과하기 쉽습니다.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 복잡하게 법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법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역할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논장은 대중들에게 설하지 않고,

지혜가 있는 사리뿟따 존자에게만 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복잡한 현대에 살고 있고, 우리의 마음도 역시 복잡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것이 더 진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간단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단순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암송하거나 읽으면 차츰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의 횟수에 따라

부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수행자 여러분들은 경전에 되풀이 되는 내용을 인내하시면서

듣거나, 읽거나,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인내를 통해서 부처님의 따뜻하고 자애로운 숨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3.JPG
2019.08.10 07: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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