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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수행

 

삶속의 불교.jpg 

 

 

5장 수행

 

붓다께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며 모든 것은 변한다. 오늘 즐겁던 것도 내일이면 변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진실을 바로 보려하지 않는다. 눈, 귀, 코, 혀, 감촉을 통해 즐기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붓다께서는 사람들이 삶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를 치료하기 위해 담마를 가르쳤다. 붓다는 보시, 지계, 수행 등의 방법으로 선을 계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수행은 선업을 짓는 보다 수준 높은 방법이다.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 계발되기 때문이다.


지혜가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들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만이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가 필요하다.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불선심을 선심으로 안다. 무지는 슬픔을 일으킨다. 붓다는 항상 사람들이 자기의 여러가지 마음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붓다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선을 계발하도록 선심과 불선심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다.


우리는 붓다께서 진리를 가르쳤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증명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불교도들에게만 진리가 아니라 어떤 종족이든지 국적이든지, 어떤 종교를 가졌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불교도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다. 사람들이 모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슬픔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거친 불선심은 알지 모르나 미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과욕이나 성욕 같은 거친 탐욕은 알지만 아름다운 것이나 소중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같은 미세한 탐욕은 알지 못한다.


왜 친척이나 친구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불선심인가? 우리는 집착이 순수한 자애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집착은 탐욕이 되기 쉽다. 우리가 순수한 자애라고 생각할 때조차도 거기에는 집착이 있을 수 있다. 집착은 선이 아니기 때문에 늦든 이르든 간에 슬픔을 불러온다. 비록 사람들이 이러한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탐욕이 불행을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는다. 질병과 늙음은 감각기관을 쇠퇴하게 하여 눈과 귀를 통해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즐길 수 없게 한다.


만일 우리가 삶의 실재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를 것이다. 우다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 사와띠 근처 동쪽 사원인 미가라 모친의 궁전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미그라의 어머님인  위사카(Visakha)의 소중하고 사랑스런 손자가 죽었다. 그래서 위사카는 옷과 머리가 젖은 채로 한 낮에 붓다에게 갔다.

 

붓다께서 물으셨다.
‘위사카야, 한 낮에 그대의 옷과 머리가 젖은 채로 왜 이 곳에 왔느냐? ‘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손자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한 낮에 옷과 머리가 젖은 채로 여기에 왔습니다.’
‘위사카여, 너는 사와띠에 있는 사람들만큼 많은 아이들과 손자들을 가지기를 원하느냐?’
‘네, 세존이시여, 저는 사와띠에 있는 사람들만큼 많은 아이들과 손자들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사와띠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루 동안 죽느냐?’
‘어떤 때는 열명, 어떤 때는 아홉 명,여덟 명,,, 어떤 때는 매일 하루에 한 명이 죽습니다.
사와띠에서 매일 사람이 죽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위사카여, 그대의 옷과 머리가 젖지 않을 일이 있겠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아이들과 손자들이 있습니다.’
‘위사카여, 백 명의 소중한 이들을 지닌 자들은 백 번의 괴로움을 지니는 것이다.
구십 명의 소중한 이들을 지닌 자들은 구십 번의 괴로움을 지니는 것이다.
팔십 명의…칠십 명…육십 명…오십 명…사십 명…삼십 명…이십 명…열 명…아홉 명…
 ………두명…한 명의 소중한 이들을 지닌 자들은 한 번의 괴로움을 지니는 것이다. 소중한 이들을 지니지 않은 자들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
그들은 슬픔이 없고 격정이 없고 평온하다. 
<슬픔이 없기를 바란다면. 위사카 경. 우다나 8.8>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노예상태로 있는 것이 불선심이라고 안 사람들은 수행을 해서 실재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은 선업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면 지혜가 열린다. 만일 우리가 부처님이 가르친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현재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삼장(율장, 경장, 논장)을 공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담마를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담마를 가르치는 것은 높은 선업이다. 이렇게 하면 배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담마를 가르치는 것은 선업을 계발하고 불선을 뿌리 뽑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수행과 연관하여 선업을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고요함을 계발하는 것, 즉 선정수행을 하는 것이다. 사마타에는 특별한 명상주제가 있는데, 이것은 고요함을 가져올 수 있고 일시적으로 탐, 진, 치를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명상주제와 고요함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사마타 수행을 잘하면 선정, 즉 몰입의 다양한 단계를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정을 얻는 것은 아주 어렵고 선정을 얻으려면 적합한 조건이 축적되어야 한다. 선정을 얻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다. 선정은 높은 수준의 선업이다. 선정은 약물을 복용해서 얻는 황홀경과는 다르다.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들은 쉬운 방법으로 원하는 목적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탐욕에 의해 자극 받는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지극한 소망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정화하고 감각적이거나 자극적인 경험을 찾아서는 안 된다.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지만 잠재적인 불선심까지 뿌리 뽑지는 못한다. 선정심이 아닐 때는 다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튀어 오른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은 자아라는 고정관념을 제거하지 못한다. 자아관념이 있는 한, 번뇌는 뿌리 뽑히지 않는다.


자아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제거할 수 있다. 위빠사나, 즉 통찰수행은 수행과 연관해서 선업을 계발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실재에 대한 무지를 제거한다. 알아차림을 통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예를 들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을 통해 몸의 감각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생각할 때 있는 그대로 본다. 우리의 내면이나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일 뿐이라고 알면 우리는 차츰 그것들을 자아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자아에 자꾸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듣는 동안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모른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듣는 것은 자아가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은 정신적 현상이다. 즉, 무언가를 경험하는 실재다. 듣는 마음이 소리를 경험한다. 소리 자체는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는 물질이다.


물질은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실재다. 소리와 청각은 듣는 조건이다. 청각도 역시 물질이다. 사람들은 청각이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청각은 귀에 있는 모종의 물질이다. 그것은 소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은 있으나 소리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각각의 마음이 일어날 때는 그 나름의 조건이 있다. 보는 것은 물질인 청각과 마찬가지로 물질인 형상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몸의 감각을 통하여 촉감을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하는 자아는 없다. 이러한 것들은 그 나름의 조건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이다.


갈애 멸진의 긴경(M38)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숲 사와티에 머물고 계실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알고 있는 사띠라는 비구가 부처님께 말했다.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식이 지속하는 것으로,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하고 느끼고 말하는 동일한 알음알이가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몇 명의 승려가 사띠의 이런 잘못된 견해를 듣고 그의 잘못을 설득하였으나 소용이 없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은 사띠 비구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띠여, 그대에게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한다.’라는
이런 아주 나쁜 견해가 생겼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알기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계속되고 윤회합니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자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쓸모없는 자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설했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쓸모없는 자여, 그러나 그대는 그대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허물을 쌓는구나.
쓸모없는 자여, 그것은 그대를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내가 설한 법에 대해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가 자기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허물을 쌓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설하셨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장하게도 그대들은 내가 설한 법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구나. 비구들이여, 참으로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설했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구들이여, 알음알이는 조건을 반연하여 생기는데, 그 각각의 조건에 따라 알음알이는 이름을 얻는다.
알음알이가 눈과 형색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눈의 알음알이[眼識]라고 한다. 알음알이가 귀와 소리를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귀의 알음알이[耳識]라고 한다. 알음알이가 코와 냄새를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코의 알음알이[鼻識]라고 한다. 알음알이가 혀와 맛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혀의 알음알이[舌識]라고 한다. 알음알이가 몸과 감촉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몸의 알음알이[身識]라고 한다.
알음알이가 마노와 법을 조건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것을 조건하여 불이 타면
그 불은 조건에 따라 이름을 얻나니,
장작으로 인해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고 하고
지저깨비로 인해 불이 타면 모닥불이라고 하고,
짚으로 인해 불이 타면 짚불이라고 하고,
소똥으로 인해 불이타면 소똥불이라고 하고,
왕겨로 인해 불이타면 왕겨불이라고 하고,
쓰레기로 인해 불이타면 쓰레기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알음알이는 어떤 것을 조건하여 생기는데,
그 각각의 조건에 따라 알음알이는 이름을 얻는다.


 
다양한 정신과 물질, 그리고 그것들이 일어나는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바른 견해를 갖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를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눈, 귀, 코, 혀, 감촉, 마음을 통해 한 순간에 하나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성을 직접 경험을 통해서 알면 정신과 물질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정신단위와 물질단위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소리를 지각하는 순간은 소리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순간과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바로 그 순간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의 특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좋거나 싫은 것으로 여긴다. 좋거나 싫은 것은 오로지 조건 때문에 나타나는 정신현상일 뿐이다. 좋거나 싫은 것은 축적된 성향에 기인한다. 각각의 마음은 조건 때문에 일어나며 이러저러한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자아는 없다.


우리는 정신현상을 자아로 알 뿐만 아니라 몸도 자아로 안다. 그러나 몸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질 요소일 뿐이다. 매우 다양한 물질이 있다. 감촉을 통해서 직접 경험되는 물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 열기, 한기, 움직임과 압력. 이들 물질은 감촉을 통해서 직접 경험되고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물질이 나타날 때마다 직접 이해하는 것이 그것들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물질로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신과 물질의 다양한 특성은 다섯 가지 감각의 문과 마음의 문을 통해 한 순간에 하나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자아라고 여긴다. 우리는 흔히 삶의 현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보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보는 것은 정신현상이며 시각을 통해 나타나는 것, 즉 형상을 경험한다.


본 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눈을 통해 나타난 것, 즉 형상을 먼저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본 후에 그 사람이나 사물을 생각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형상을 경험하는, 즉 보는 정신현상을 무시한다. 보는 정신현상은 사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정신의 유형이다.


만일 있는 그대로의 보는 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단지 소리를 인지할 뿐인 듣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들음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특성을 인지할 수 있다. 말하자면 들음이란 귀를 통해서 소리를 알아차리는 실재인 정신현상이다. 우리는 점차 듣는 것의 고유한 성질에 익숙하게 되어 그것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고 다른 정신현상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물질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자아라고 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에 하나의 정신현상의 특성이나 물질현상의 특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들을 때는 듣는 것과 소리가 동시에 있으나 우리는 듣는 것과 소리를 동시에 알아차릴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대상만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고 또 다른 순간에 듣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것들의 특성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순간에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것들을 회상하는 것이고 정신과 물질이라는 실재에 이름 붙이는 것은 실재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생각하기만 하고 그 특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면 계속 집착할 것이고, 그것들을 자아로부터 분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드러나는 특성을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이미 나타난 실재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는 우선 들음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그 다음 들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고는 알지 못한다. 각각의 실재가 각각의 순간에 나타날 것이고 우리가 실재를 알아차릴 때 특별히 따라 가면서 보아야 할 연속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직접 경험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정신현상이든지 물질현상이든지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예를 들어 냄새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냄새 맡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우리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냄새 맡는 것의 특성을 알아차린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그것이 냄새라고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거나 그것이 정신현상이라고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


알아차림도 마찬가지로 적당한 조건이 있으면 일어나는 정신현상 중의 하나다. 알아차리는 자아는 없으며 알아차림을 마음대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자아도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계발되는 바른 견해는 알아차림이 일어나는 조건이 된다. 알아차림이 일어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있을 수 있을 수 있고 또 정신과 물질에 대해서 생각만 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알아차림이 잘 안 되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바른 알아차림을 하면 유익하다. 왜냐하면 실재를 직접 경험해서 얻는 지혜는 실재를 생각해서 얻거나 사마타 수행을 해서 얻는 지혜보다 높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매우 수준 높은 선업이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개념이나 자아에 덜 집착하게 되고 결국은 번뇌를 소멸하기 때문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적으면 온 세상이 행복하다.


웰라마 경(A9:2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와티 근처 제따숲 아나따삔디까 승원에 머물면서 아나따삔디까 장자에게 과보를 가져오는 여러 가지 선행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붓다와 승단에 보시하는 것과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큰 선업이지만 또 다른 높은 선업도 있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면 선과보를 받을 것이다.
청정한 마음으로 계를 받아 지녀서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면 ....

청정한 마음으로 이러한 계를 지키면 자애의 향기를 지니게 될 것이다.손가락 튀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이라고 인식한다면 더 큰 결실이 있을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무상에 대한 인식이 계발된다. 무상에 대한 인식이 다른 어떤 선업보다 더 과보가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정신과 물질의 무상을 아는 것은 바른 견해고 이런 견해는 우리의 삶을 바꾼다. 그것은 결국 집착과 성냄과 무지를 제거할 것이다. 늙거나 병들거나 사고 때문에 언제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성냄과 두려움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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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0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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