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연 스님의 수행의 준비와 실천 <工夫>
일과 : 자아라는 명상
업, 피할 수 없는 굴레(2)
흔히 우리는 선업과 악업의 척도에 따라 다음 생을 결정짓는다고 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善)이라고 하며, 무엇을 악(惡)이라 규정지을까요. 유사이래 지금까지 집적된 선과 악의 개념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그 시대의 사상이나 이념의 잣대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악으로 규졍했던 중세의 마녀 사냥이나 십자군전쟁의 면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 신을 위해 기꺼이 살상을 해도 된다는 당시의 윤리적 신념과 정의관은 현대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조선시대에는 삼종지도나 열녀가 여성이 갖춰야 할 윤리적 덕목이었습니다. 즉 선악의 기준은 그 시대, 그 장소에서만 맞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준과 가치(사상, 이념, 윤리, 도덕, 관습, 예의, 규범, 정의, 신앙....)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고, 장소에 따라 달리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때와 장소를 초월하는 기준은 없는 것일까요. 불교에서는 이타(利他)와 이기(利己), 그리고 ‘사실’과 ‘거짓’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는 업을 형성하는 기준이 됩니다. 업은 선악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의도적 행위인 업은 행위의 주체인 자아에 의해서만 형성되며,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와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가르칩니다. 자아가 실재하지 않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이 무아일지라도 의도의 주체인 자아가 공부를 통해 무아를 깨치기 전까지 현상은 ‘실재’로 여겨지며, ‘나’라고 여기는 자아에 의해 업과 인과가 존재하는 현상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자아로 존재하는 우리는 멍에인 업에 대해 상세히 알아야 합니다. 현상에서의 업은 지금과 미래의 삶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는 자아는 업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이롭든 해롭든 그 업을 상속하는 주체입니다. <14-15쪽>
2018년10월16일 아침, 현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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