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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불교 시대의 한국불교
다불교 시대의 한국불교

한국불교(Korean Buddhism)인가, ‘한국의 불교’(Buddhism in Korea)인가?

외국의 불교학자나 불교계 인사들이 한국불교에 대해 물으면 꼭 반문하는 질문입니다. 그 분들은 한국인들이 믿는 불교는 당연히 한국불교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국사람들은 태국불교를 티베트 사람들은 티베트불교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인들의 수행과 신행활동, 불교문화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불교에 관한 지식의 습득 경로와 내용을 보면, 지금 한국의 불교는 선종(禪宗)을 표방하는 ‘조계종’이라는 명칭으로 포괄 할 수 없는 다불교(多佛敎)적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말씀드린 탈종교 상황이 범종교적이며 범세계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다불교는 한국불교의 특수 상황입니다. 물론 숫자로만 보자면 한국불교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전통적 의미의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불교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관이나 수행관과 같은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불교계를 시끄럽게 했던 간화선과 비파사나 수행 간의 수월성 논쟁은 결론도 없이 이미 해묵은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교사에 대한 이해와 경전에 대한 평가는 불교지식의 습득 경로나 입장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간화선이야 말로 부처님의 골수요 최상승(最上乘)이라는 주장은 희미한 메아리로만 남은 가운데 어떤 이들은 파알리 경전만이 불설(佛說)이라는 신념으로 대승비불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한국불교의 전통마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특정 의례나 신행방식을 두고 어떤 이들은 ‘특색’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하고 또 다른 이들은 비불교적 심지어 미신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티베트 불교나 남방불교에서 미래불교의 모습을 찾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신불교(新佛敎, Navayana, neo-Buddhism)를 미래불교의 대안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적 정체성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불교적 문명 코드를 읽어내는 소위 ‘첨단’ 불교인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불공(佛供)드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불교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불교인들도 있습니다.

각양각색 백인백색의 ‘불교들’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힐링, 웰빙, 요가, 명상 등 생활트렌드 산업에서 말하는 ‘불교’ 혹은 ‘불교적인 것’까지 보탠다면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그야말로 ‘불교’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불교인 다불교적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불교는 한국불교의 특수한 상황입니다. 19세기말 이래 본격화된 서양 불교권을 제외한다면 전통적인 불교 국가 가운데 다불교적 상황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다불교적 상황을 초래한 역사적 연원은 대략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완으로 끝난 한국 근대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시작된 다양한 불교개혁 프로그램들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추동력을 만들지 못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왜색불교의 청산과정에서 완전히 그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1947년 봉암사결사는 ‘출가수행 종풍의 확립’이라는 기치 하에 한국불교의 방향을 전통복고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런 한편 1962년 출범한 현재의 통합종단은 한국사회의 전반적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종단 운영 등의 제도적 측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근대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도나 시스템과 같은 변화에 출가스님들을 비롯한 일반적 한국 불교인들의 의식변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지체(cultural lag) 현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이후 한국불교계에서 벌어졌던 논쟁들, 이를테면 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선후문제, 돈점논쟁 그리고 비교적 근년의 간화선과 비파사나를 둘러싼 수월성 논쟁 등은 무의미하거나 결론 없는 비생산적인 논쟁들로서 한국불교의 문화지체에 따른 전통과 근대의 길항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90년대 이후 출판, 유학, 현지수행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입 소개되기 시작한 지역불교 전통들입니다. 남방 상좌부 전통이나 티베트불교가 그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지적 호기심에 의한 지식 수입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수행에 참여하거나 수행센터를 한국에 건립하는 등 현지불교를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전통의 불교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조계종단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에 대한 실망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계종의 스님들 가운데 선방에서 10년 넘게 한 수행보다 미얀마 한철 수행이 더 낫다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는 것은 새삼 숨길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조계종 스님이 남방불교 수행을 칭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 지금 한국불교의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19세기 중엽 소위 근대불교학의 이름으로 서구에서 창안(創案)된 ‘부디즘’(buddhism)의 영향입니다. 부디즘은 불교학의 이름으로 스리랑카, 일본, 한국, 중국 등 전통적인 불교권에 소개되었으며 근대불교 지식인들의 불교사에 대한 조망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불교가 ‘역사적 지식’의 하나로 변질되어버린 부정적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부디즘은 다시 ‘서구불교’ 혹은 현대불교의 이름으로 역수입되어 전통적 불교권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출판, 수행 등에 있어 수입불교가 불교계 내외의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양한 경로의 불교 지식과 다양한 수행법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우리의 주체적 관점의 여부입니다. 상식적인 말씀이지만 주체적 관점이 없는 가운데의 다양성은 혼란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체가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다양성은 더 큰 세상, 더 큰 한국불교를 만들어 가는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출전 : 1611호 / 2021년 12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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