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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거진여행

속초거진여행(2011.11.5-6)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제이가도 하다. <대니엘 드레이크>

 

2021.11.5.04, 잠에서 깨어 대충 여장을 꾸려 백석역2번 출구로 갔다. 성호, 무상 그리고 법운거사님들과 속초,거진 12일의 여행이다.

작년 1월에 갔다 온 후로 정말 오랜만에 여행이다. 최고의 운전가이신 성호님의 안전하고 편안한 택시로 5시에 일산을 출발하여 가라뫼에서 이번 여행의 집행위원장이신 법운님을 태우고 속초 동명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동명항은 오징어난전으로 유명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08시 쯤 동명항에 도착하여 9번 식당에서 오징어 2마리 2만원, 도루묵찌게 3만원 짜리와 햇반 2개를 주문하고 소주 2병을 시켜서 항구의 비릿한 향내를 맡으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우렸다. 비싼 오징어라 단맛이 살짝 느껴졌고 도루목찌게도 뜨뜻한 국물에 제법 맛이 좋았다. 마침 양미리철이라 양미리를 잡은 베들이 속속 항구에 도착하고 있었고, 많은 아줌씨들이 작업을 위해 대기하고 있거나 부지런히 양미리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법운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 보고 있으려니까 작업 인부가 큰소리로 방해 된다며 나가라고 하였다. 양미리는 < 큰가시고기목 양미리과에 속하는 해산어류. 한류성 어종인 양미리는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비롯하여 오호츠크해, 일본, 연해주 등에 분포한다. 연안의 깊은 곳에 무리지어 서식한다.

산란기는 4~7월이며, 산란기가 되면 연안 가까이로 이동한다. 우리나라의 동해안 지역에서 늦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잡힌다. 몸은 가늘고 긴 원통형이며, 까나리와 모양이 비슷하나 몸길이가 약 15cm로 더 작다. 먹이는 작은 갑각류와 요각류 등이다. 다음백과>

도루목은 <몸길이가 보통 20cm쯤 나가는 바닷물고기이다. 몸은 심하게 옆으로 편평한데 몸의 앞쪽은 높고 뒤로 갈수로 점차 낮아지다. 주둥이와 눈이 크며 비늘이 없다. 등은 황갈색 바탕에 흑갈색 무늬가 산재하며 배는 은백색이다. 수심 100-400m의 모래지역에 서식하며 주로 무척추동물을 먹는다. 수심이 얕은 지역의 해초류 군락에서 11-12월에 산란한다. 동해 중부 이북에 서식한다. 일본 북부, 캄차카 반도 해역, 사할린 및 알래스카에 분포한다. 주로 구이와 찌개로 이용하는데 겨울철에 맛이 좋다. 도루묵이, 도루맥이, 은어 등으로도 부른다. 한국자원연구원>

머슥하게 물러나고 양양 진전사로 향하였다. 기온은 10도 정도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20도 정도의 온난한 기온으로 바뀌고 있었고, 새벽에는 안개가 끼었으나 해가 뜨면서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진전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초조(初祖)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의는 784(선덕왕 5)에 당나라로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821(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하였으나, 사람들이 교종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에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와 손상좌 체징(體澄)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이 진전사의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1기와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이 있으며, 절터는 양양 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절터를 발굴하여, 사역(寺域)은 계단중문.누각터를 포함한 남쪽 축대지역, 법당과 7채의 건물터가 드러난 지역, 선방터가 보이는 북쪽 축대지역 등으로 구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005년부터 진전사를 복원하기 시작하여 적광보전(寂光寶殿)과 요사채를 건립하였으며 2019년 현재까지 복원불사가 진행 중이다. 민족문화대백과서전>

 

진전사로 올라가는 산길은 산촌의 여여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길 옆 옛 절터는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진전사에 도착하여 법당에 참배하고 삼층석탑에도 참배하였다. 법운님과 함께 기와 보시를 하고 식구들의 안녕도 빌어보았다. 진전사를 나와서 화암사로 향하였다.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혜공왕 5)진표(眞表)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 서쪽에 장안사(長安寺),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태조 24)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태종 1)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794(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1864(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912년에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6.25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암사는 일주문부터 차단기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서 무상이 종무소에 연락하여 통과하였고, 조금 올라가니 다시 2차 차단기가 있어서 역시 종무소에 연락하여 편안하게 화암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화암사는 맞은 편 언덕에 있는 수 바위가 일품이며 경내도 널찍하여 대웅전 등 전각들은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친견할 수 있으며, 뒤편으로는 금강산 초입의 높은 봉우리가 버티고 있었다. 법당에 참배하고 사진도 찍은 후에 미시령 아래에 위치한 두부요리로 유명한 초정본점 식당에서 옥수수 막거리를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늦가을의 여유를 즐기며 점심을 맛있게 먹고 건봉사로 향하였다.

건봉사는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지만 여름이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야트막한 기와담으로 둘러친 건봉사에는 50여 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백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흩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고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현위치에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흥왕 7(520)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878년 건봉산에 큰불이 나면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라 할 수도 있겠다. 돌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이곳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능파교라 하는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 그나마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대웅전 앞에도 또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말한다. 팔상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 앞에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 사리탑과 부도각비가 하나씩 서 있다.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이 밖에도 건봉사에는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에 의한 의승병봉기처이기도 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승병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

 

건봉사는 화암사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 순례하였던 사찰로 옛 절터가 넓어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으며 역시 금강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이다. 늦가을의 따사한 햇살을 받으며 경내를 탐방하고 법당에 올라가서 참배를 하고 단체로 공양미 2개를 올리고 왔다. 일주문 쪽으로 내려와서 아이스콘을 사먹고 몸에 좋은 칡즙도 한잔씩 마셨다. 건봉사를 나와서 화진포로 향하였다. 화진포는 이승만, 김일성, 이기붕의 옛 별장이 있는 곳으로 호수와 더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이승만 별장은 <이승만 별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머물렀던 곳으로 1954년에 신축된 뒤 1961년에 폐허가 되었다가 19977월 육군이 재건축하여 1999년 전시관으로 복원되었다. 별장의 외부는 별장답지 않게 아담하고 소박하며 허름하게 보인다. 내부는 침실과 집무실로 쓰이던 방 두 개와 거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유족들에게 기증받은 물품들로 전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기거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단출한 가구와 소박한 물건들 그리고 생전의 사진들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승만별장은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별장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한데 어우러진 화진포 두 개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까닭에 화진포의 세 별장 중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용히 바깥 풍광을 즐기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별장이다. 한국관광공사자료>

 

조용한 산길을 올라가서 다시 내려가니 화진포의 풍광이 보이며 옆 언덕위에 별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입장료는 3천원으로 법운님만 입장권을 샀고, 우리 3명은 무료관람이었다. 별장은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이승만대통령의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박사는 그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으며 현 집권세력으로 부터는 독재자란 이미지로 부정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평가할 때에는 전부 긍정 아니면 부정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개개인사안과 실적,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잘한 것은 잘 했고, 못한 것은 못 했다고 평가하여야 한다. 모든 사안을 善惡으로 구분하는 것은 상당한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역사적 자료들을 세심히 보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화진포가 한눈에 내려 보이고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닌가를 느껴보면서 오늘의 숙소인 대진항민박집으로 출발하였다. 민박집은 대진항 안에 있었으며 생각보다는 깨끗하고 방도 2개나 있고 거실도 널찍하였다. 16시에 도착하여 샤워도 하고 휴식을 취한 후에 바로 옆에 있는 수산시장으로 향하였고,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대진항 방파제도 산책하였다. 여기저기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물고기를 잡은 낚시꾼은 보지 못하였다. 차박하기 위하여 텐트도 여기저기 쳐 놓고 있었다. 대진항의 일몰을 잠시 감상하고 나서 수산시장으로 들어갔다. 자연산 광어와 도다리, 그리고 매운탕 감인 삼식이를 12만원에 구입하여 2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1인당 5천원씩을 받고 야채 등 반찬을 주고 매운탕을 끓여주었다.

광어회와 도다리회는 살짝 시장끼가 있어서 그런지 단맛이 나면서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좋은 분들과의 자리인지로 연신 술잔을 들이키며 가을의 저녁을 즐겨보았다. 깊어가는 밤과 함께 이 가을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얼큰한 삼식이 매운탕도 일품이었고, 만찬을 즐기고 난 후에 숙소로 돌아와 성호님이 끓여주신 라면을 곁들여 맥주 한잔을 더 줄겨보았다.

즐겁고 흥겨운 시간들이 지나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자리에 들어서 단잠을 시원하게 푹 자고 있었다. 간간히 귓가에 누군가가 화장실을 가는 기척도 있었지만 술기운과 피곤함으로 정말 맛있는 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날 6시경에 기상하여 개운한 몸으로 일출을 보러 갔다. 대진항 방파제에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흐린 날씨는 아니지만 수평선쪽으로 구름이 끼여 있어서 선명한 일출은 보지 못하고 구름너머의 붉은 기운만 살짝 보면서 아침 식사 장소인 쌍뚱이네식당으로 갔다. 이 식당은 허명만의 식객여행에 소개된 식당으로 백반으로 유명한 소박한 식당이었다. 우리는 순두부 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갈증을 느끼는 법운님은 먹거리 1통을 시켜 해장을 하였다. 식당은 몇몇 팀의 손님들이 있었으며 아주 뛰어난 음식 맛은 아니지만 담백하고 정갈한 백반의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대진항을 산책하면서 숙소로 돌아와서 정리를 하고 09시에 일산으로 출발하였다. 도중에 진부령고개도 넘고 그 아래 황태덕장에서 황태도 구입하고 철정휴게소도 들리고, 가을의 청명함을 느껴보면서 가평휴게소에 도착하였다. 휴게소에서 국수와 우동으로 점심을 먹고 무상님이 호두과자를 구입하여 한 봉지씩 주었다. 우리가 가는 상행선 고속도로는 한가하였으나 반대편 속초방면 고속도로는 정체로 밀리고 있었다. 1330분에 일산에 도착하여 다음을 기약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향하였다.

여행은 자주 다니고 있지만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늘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인생을 살아감에 활력과 힐링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특히 이번에 다녀온 여행은 코로나시대에 도반들과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며 진전사, 화암사, 건봉사 등 삼사순례를 했다는 역사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순간순간을 즐겨보며, 나와 남과 주변여건들에 감사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20211161645분에 현담이 그저 생각나는대로 적어 보았다.

 

 

 

 

 

 

2021.11.06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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