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홍서원
혜총스님 실상문학상 이사장·부산 감로사 주지
불보살의 본심, 네 가지 큰 서원
중생과 함께 열반에 들려는 대승심
사성제 십이연기 통달 대지혜 바탕
“중생도 부처님, 보살과 일체” 인식
일반적으로 불교의 의식은 삼귀의로 시작해서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끝난다. 이 삼귀의와 사홍서원만 잘 이해하고 행한다고 해도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홍서원은 초기경전인 <아함경>부터 <반야경>, <법화경> 등에 일관되게 설해져 있다. 사홍서원이 지금과 같은 문장을 갖추게 된 것은 중국 천태종의 제2조인 남악사대(南嶽思大, 515~577) 선사의 <입서원문(立誓願文)>부터라고 전한다. 남악사대 선사는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법화경>을 널리 펼치고자 애쓴 분이다. 이 스님이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되는 <법화경> ‘약초유품’에 보면 여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여래는 아직 제도하지 못한 자는 제도하고(未度者令度), 아직 이해하지 못한 자를 이해시키고(未解者令解), 아직 편안하지 못한 자를 편안하게 하고(未安者令安), 아직 열반에 들지 못한 자를 열반에 들게 한다(未涅槃者令得涅槃).”
이것이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본심이요, 바로 불보살님의 네 가지 큰 서원이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사홍서원을 낭송하지만 실로 이 사홍서원은 보살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세울 수 없는 원이다. 자신은 이미 열반에 들 능력을 갖추었지만 스스로 원해서 중생 속으로 들어온 분이 보살이다. 대자비심을 근본으로 중생을 위하여 오랜 세월 빛을 감추고 티끌처럼 중생 속에 머무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사는 보살이 아니고서는 이 네 가지 큰 서원을 세우기란 힘든 것이다.
사홍서원은 세속적인 복덕만을 구하는 범부 중생은 물론 자신의 해탈이나 성취하려는 성문이나 연각과 같은 이들의 소승심(小乘心)으로는 감히 세울 수 없는 큰 서원이다. 왜냐하면 보살만이 중생과 함께 살면서 중생과 더불어 열반에 들고자 하는 대승심(大乘心)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넓고 큰 홍(弘)자를 쓴다. 이 크고 넓은 원력을 일으킨 근본이 무엇인가 하면 대자비심이다. 그리고 이 대자비심은 또 어디서 나왔는가.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통달한 대지혜심에서 출현한다. 그런 보살의 눈에는 오로지 중생도 곧 부처님이요, 보살과 평등한 한 몸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사홍서원을 법회 때마다 읽는 것은 이 불보살님의 본심과 일치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는가. 우리도 불보살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각찰(覺察)이요, 불보살님 앞에서의 다짐이다.
이 불보살님의 한결같은 원력, 한결같은 마음을 향해 나아가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사생육도의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모진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불행 중 다행히도 사람의 몸을 받았고 부처님 법을 만나 거룩한 부처님과 보살님의 무량한 본심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 또다시 기나긴 윤회의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인가.
그러니 우리는 사홍서원이란 목표를 가슴에 지니고 변함없이 공덕을 쌓고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이 사바세계를 벗어날 길이 없다. 누구도 이 고통을 대신해줄 수 없는데 울며불며 천지신명에 매달린다고 해결되겠는가.
[출전 : 불교신문3657호/2021년3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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