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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수행소식지 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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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반 (manbh)
김열권법사님의 위빠사나 집중 수행 참가하신분들께 보내드리는 위빠사나 수행 소식지로, 매달 10일 경 인터넷으로 배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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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께 재벌되는 길 물으니 -마삼근
 



성철스님께 재벌되는 길 물으니…“마삼근”


화요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 불교방송 2층 강의실. 황사바람과 벚꽃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바깥 세상과 달리 이곳만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 했다. 30여명의 사람들이 미동도 없이 좌선에 열중하고 있었다. 고요함만을 모두 모아 놓은 듯 부동의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들의 수행법은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위파사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과 변화들을 관(觀)하는 동안 세속에서 묻혀왔던 번뇌와 근심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몸 안에 가득 차는 편안함과 안온함. 얼굴엔 어느덧 미소가 흘렀다.


위파사나 호흡명상원 김열권 원장이 매주 한번 지도하고 있는 불교방송 위파사나 강좌의 모습이다. 9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 속에 5년째 강의를 해 오고 있다. 위파사나의 특징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부처님이 이것을 통해 수행을 하셨던 만큼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다른 수행법처럼 독특한 호흡법이나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몸과 마음을 고요히 관하면 세상과 삶의 본질인 오온(五蘊)과 12연기(十二緣起)를 자연스럽게 체득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효용성 때문에 현재 선방 스님들의 상당수가 위파사나를 하고 있고 전국에 위파사나 수련센터만 10여 곳이 넘게 성행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위파사나는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수행법이었다. 그나마 화두선의 전통을 강하게 지니고있는 우리 현실에서 태국·미얀마 등에서 역수입돼 들어오는 위파사나는 ‘소승선’이란 ‘멍에’ 아래 전통적인 불교수행과는 거리가 먼 가치 없는 수행법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런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위파사나의 뛰어난 장점과 효용성을 알린 선구자가 바로 김열권 원장이다. 그는 90년대 초 한국인 최초로 미얀마로 출가, 위파사나를 배워 온 사람이다. 93년 그가 펴낸 《위빠사나Ⅰ·Ⅱ》는 위파사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7년이 지난 지금도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부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위파사나로 부처님이 되셨고, 부처님이 되신 후에는 위파사나로 중생을 구제하였으며 위파사나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2,500년 부처님이 발견하신 깨달음의 얻는 가장 유일한 길이 바로 위파사나입니다. 우리는 흔히 단전호흡, 기공, 요가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들은 순간적인 깨달음은 줄 지언정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위파사나처럼 오온(五蘊)과 12연기(十二緣起)를 관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법인(三法印)의 진리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러나 처음부터 위파사나 수행자는 아니었다. 위파사나를 하기 전 이미 10년간 치열하게 화두를 잡았던 수행자였다. 이런 경력 때문에 그의 위파사나 전파는 더욱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꿈은 사실 수행자가 아니었다. 태몽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꿈이었을 만큼 지중한 불가와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망은 많은 돈을 벌어 농촌에 전문대학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농촌의 근대화에 기여해 보겠다는 기특(?)한 생각도 담겨있었다. 성철 스님을 만나 뵙고 처음으로 화두를 받는 자리에서 했던 질문도 ‘재벌이 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사업에 성공하여 남을 도우는 것이 당시의 꿈이었습니다. 유마거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재벌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스님께 요청을 했던 거지요. 그러자 스님이 ‘삼베 서근(麻三斤)'라는 화두를 주셨습니다. 매일 108배 참회와 베풂도 함께 실천하라고 하셨지요. 이것만 실천하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수행은 이처럼 싱겁게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무섭게 화두에 몰입했다. 기아산업 무역부에 근무하던 시절 그는 하루 평균 18시간 화두를 붙들고 있을 만큼 용맹정진을 했다. 물론 재벌이 되겠다는 생각은 화두를 들면서부터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성철 스님은 이것을 미리 알았으리라.


“처음엔 실제 삼베를 생각하며 화두를 들었습니다. 화두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낙처를 참구해야 하는데 그것을 몰랐지요. 그러나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점차 조금씩 발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에서도 화두를 놓치지 않을 만큼 용맹정진했지요”


그러나 수행이 깊어지면 마가 항상 따라다니기 마련.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아들인 관계로 집안에서 결혼에 대한 성화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집안의 성화도 있고 자신의 수행 단계를 실험해 보고자하는 교만한 마음도 생겨 술도 마시고 옛 애인과 하루밤을 보낸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화두를 한참 뒤로 후퇴시킬 줄이야. 2∼3개월만 용맹정진하면 호랑이 꼬리라도 잡을 수 있으리라던 그 시절이었다.


90년 그가 미얀마로 떠나는 날은 김포공항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화두를 들고 있었다. 직장생활 5년. 직장을 버리고 산 속에서 5년. 꼬박 10년간 계속해서 들고 있던 바로 그 화두였다. 그가 미얀마로 가게된 것은 ‘마리안느’라는 네덜란드 태생의 백발의 아가씨 덕분이었다. 그는 염불 수행과 태극권, 화두, 위파사나 등 다양한 수행 경력의 소유자로 한국불교의 화두에만 집착하는 폐단을 지적하며 부처님 수행의 근본은 위파사나이며 이는 미얀마·태국 등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설명을 그에게 해준 터였다.


미얀마 마하시 수도원에서의 수련은 그에게는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눈 밝은 스승에게 점검 받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운 한국과는 달리 매일 스승들의 철저한 관리아래 수행은 진행됐다. 오후불식·묵언, 근기에 맞는 위파사나 수행. 특히 이틀에 한번씩 수행을 점검하는 스승들과의 인터뷰 과정은 수행의 발전을 이루는 가장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몸의 움직임과 마음을 살펴 그 체험을 스승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몸과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망상과 나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꼬박 1년간을 미얀마에서 살았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결코 거짓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파사나는 경전 그 차체였고, 경전은 위파사나에 대한 해설서였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가셨던 올바른 길을 찾은 거지요.”


그는 96년에서야 비로소 ‘위파사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얀마에서 귀국한지 꼭 5년 만이었다. 옛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보림의 과정을 거치듯 그는 또 다시 5년간을 산 속에서 홀로 수행에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Ⅰ·Ⅱ》였다. 그는 또 역서로 《고요한 숲속의 연못》 《위파사나 열두 선사》도 내놓았다. 지난해 말 《깨달음으로 가는 오직 한길》을 펴낸데 이어 최근엔 《위빠사나 성자 아짠문》이라는 책을 발간하는 등 위파사나를 알리기 위한 작업을 쉬지 않고 있다.


“초보 수행자들의 경우 어떤 수행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수행에 대한 올바른 안목이 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통해 정견의 눈을 틔우고 위파사나를 시작한다면 어떤 시행착오도 없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다시 산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위파사나를 알리기 위한 나름대로의 역할을 이제는 접을 때가 됐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스스로를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화두참구를 할 때는 경봉·성철·향곡·송담 스님 등 고승들을 두루 친견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빨리 ‘위파사나’를 접해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부처님의 남다른 가피 때문이란다.


그는 대학시절 친견했던 경봉 스님을 잊지 못했다.

“스님 진리란 무엇입니까?”

“탄지(彈指)니라. 탄지니라”


떠오르는 스님의 동자 같은 천진스런 웃음. 이제는 꼬리를 잡은 것도 같은데.



법보신문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취재후기-말 많은 수행계에서 찾은 길은 ‘겸손’


그를 처음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수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너무나 평범했다.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10년간의 목숨을 건 화두참구·머나먼 타국인 미얀마에서의 위파사나 수행. 깨달음을 향한 그의 독특한 삶의 여정에 비하면 참으로 겸손한 대답이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서며 그의 20여 년간의 수행 결과는 아마도 ‘겸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자신의 수행경지를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다만 “이제는 부처님이 걸으셨던 길에 대해 한 점 의심이 없다”는 말로 자신의 수행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가슴이 서늘했다.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도 이런 겸손함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수행의 힘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의 이런 겸손이 말도 많고 뒤탈도 많은 수행계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숨을 고요히 고르고 마음속의 변화를 살펴본다. 번뇌와 분노·짜증. 외물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마음의 찌꺼기들. 이런 찌꺼기들 때문에 그토록 삶이 무거웠었나 보다.

200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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