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에서 ** 만공선사의 인가를 받고 **
효봉스님은 상원사에서 신선한 선(禪)의 체취에 젖어서 겨울 한철을 보낸 뒤 다시 운수행각의 발길을 남으로 하여 단기 4269년(1936년) 하안거를 태백산 정암사에서 마치고 만공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덕숭산으로 옮겼다.
만공스님은 한국 근세 불교에서 경허(鏡虛)대선사와 더불어 한국의 선행(禪行)에 일대 바람을 일으켰던 거목으로 지칭된다. 효봉스님이 이와 같은 큰 거목의 그늘에 들어가 금강산 유점사부터 깊은 법연이 있기에 비록 한철이기는 하지만 함께 정진을 했다는 것은 한국의 선맥을 더듬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아닐 수 없다
만공스님은 열네 살에 출가하여 스승을 찾아 헤매다가 동학사에서 경허스님을 만나 사미계를 받았다. 만공선사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활구(活句)로 공안(公案)을 삼았다.
이 화두를 들고 참선삼매에 빠져 밤이 깊어가는 줄도, 날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벽을 향하여 결 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홀연히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온 몸을 감싸고 모든 존재를 녹여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새벽 종소리가 장엄한 염불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들려왔다.
만일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모든 실상 마음이 짓는 줄을 알아야 하리.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이때 그의 가슴에 꽉 차 있던 의단 덩어리가 확연히 풀렸다. 존재의 근원, 번뇌의 원천, 온갖 현상의 변화는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기쁨에 젖어 오도송을 지었다.
빈산에 서리의 기운은 고금 밖이요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넘어왔나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 뜨네.
空山霜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磨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효봉스님이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선사를 모시고 정진할때 선사는 효봉스님의 그릇됨을 인정하시고 선옹(船翁)이라는 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전법계를 주었다.
치우치지 않은 바른 도리를 이제 선옹자에게 부촉하노니 밑이 없는 그 배를 타고 흐름에 따라 미묘한 법을 드러내라.
無偏正道理 今付船翁子
駕無底船 隨流得妙也
효봉스님은 금강산에서 여러 차례 만공선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해가 단기 4266년(서기 1933년) 겨울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였다.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처음 만공선사를 뵈었을때 효봉스님은 공부에 막 득력(得力)한 터여서 선사의 기틀이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만공 같은 큰스님을 뵙고도 다음과 같은 선문답에 응할 수 있었다.
효봉스님이 먼저 만공선사에게 물었다.
\\"천하에 살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누굽니까?\\"
만공선사가 대답하였다.
\\"오늘 처음으로 보겠구먼.\\" \\"화상의 머리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자 만공선사는 머리를 숙여서 내밀었다. 효봉선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물러났다. 이들 선지식들 사이에 오가는 교감은 선문답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일상의 손놀림 하나까지도 선향(禪香)에 흠뻑 젖어서 정갈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루는 만공선사가 효봉선사에게 물었다.
\\"옛날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고 길을 가시다가 어느 지점을 가리키면서 절터가 아주 좋다 하였다. 제석천왕이 풀 한 포기를 거기 꽂아 놓고 절을 세웠다 하니 세존께서 미소하시고 답하지 않으셨다. 그 뜻이 무엇인고?\\" \\"화상께서는 절 짓기를 매우 좋아하신다더니 과연 그렇습니다.\\"
이에 만공선사는 미소만 짓고 아무 말이 없었다.
만공선사를 이별하고 효봉스님은 다시 선지식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발길이 닿은 곳이
천년고찰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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