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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앞 1000년 촛불 ...
photo금오산 정상 바로 아래 약사암의 모습. 기이한 바위 봉우리 앞에 기둥을 박아 받쳐 지은 암자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암자 앞 작은 암봉에는 종각을 지어 구름다리를 걸쳐놓았다.



# 구미의 ‘원탑’은 금오산

의견일치. 구미를 대표하는 명소는 단연 금오산이다. 관광객에게도, 거기 사는 주민들에게 물어도 구미의 속칭 ‘원탑’은 금오산이다. 금오산은 시내와 가깝다. 시내 한복판에서 금오산 들머리까지는 차로 10분이면 넉넉하다. 실제로 구미역에서 금오산 들머리를 지나서 케이블카 탑승장 앞까지 딱 4㎞. 차로 7분 거리다.

‘서울로 치면 북한산 격’이라 썼다가 지운다. 금오산이 도심과 훨씬 더 가까우니까. 북한산이 서울 사람들에게 ‘공원’이라면, 구미 사람들에게 금오산은 ‘정원’ 아니 ‘마당’이다. 물리적 거리만 가까운 게 아니다. 구미 사람 마음 안에는 자연스럽게 금오산이 있다. 심리적인 거리도, 물리적 거리도 가깝다는 얘기다.

금오산은 국내 최초의 도립공원이다. 금오산이 도립공원이 된 건 53년 전인 1970년 6월 1일이다. 그해 금오산 딱 한 곳이 도립공원이 됐다. 이듬해 남한산성과 모악산이 도립공원이 됐다. 선운산·문경새재·경포대 등 내로라하는 명소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건, 그러고 나서 10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왜 금오산이 먼저였을까. 짐작되는 바가 있다. 금오산이 도립공원이 되기 한 해 전 1969년. 구미는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됐다. 섬유·전자 등 노동집약적 기업 중심의 산업단지가 들어서기로 정해졌으니 폭발적인 인구 유입에 따른 도시 인프라 구축은 필수였다. 상하수도나 주택 같은 필수적인 인프라 투자에도 돈이 모자랐던 시절이었으니, 여가와 휴식을 위한 편의시설 구축은 언감생심이었으리라.

금오산을 국내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던 건 바로 그곳에 국가산업단지 노동자들의 휴식과 위무의 역할을 맡긴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도립공원 지정이 ‘산이 가진 경관이나 자연 자원에 대한 평가’였다기보다는, 산에 휴식과 위무의 기능을 부여한다는 의미에 가까웠을 거란 얘기다. 돌이켜보면 금오산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금오산은, 여전히 구미 사람 가까이에 있다.

photo레트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금오산케이블카. 1974년에 개통됐으니 올해 운행 49년째다.



# 복고풍 케이블카가 보여주는 것

금오산에는 케이블카가 있다. 1974년 9월 30일 운행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49년째. 내년이면 ‘개통 50년’이다. 현존 케이블카 중에서 나이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금오산이 ‘영남 팔경’ 중 하나라지만 전국적인 지명도는 떨어졌는데도, 일찌감치 남산이나 설악산에 이어 케이블카가 가설됐던 건, 국가산업공단 유입 인구 증가에 따른 사업성 때문이었다. 금오산 케이블카는 구미 출신 재일교포 사업가 고 박진용 씨의 투자로 건설됐다. 박 씨는 케이블카와 함께 금오산 아래 구미관광호텔을 지었는데, 지금도 금오산 케이블카는 옛 구미관광호텔인 호텔 금오산이 운영하고 있다.

케이블카가 손님으로 겨누고 있는 대상은 등산객보다는 행락객이다. 케이블카는 산의 허리춤쯤 되는 지점인 절집 해운사와 대혜폭포까지만 데려다준다. 케이블카의 운행 거리는 805m고 탑승시간은 6분 남짓. 금오산의 높이가 해발 976m인데, 상부 종점의 해발고도가 절반에 한참 못 미치는 400m쯤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행락객들의 목적지는 대혜폭포다. ‘큰(大) 혜택(惠)을 주는 폭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울 명(鳴) 자를 써서 명금폭포라 불리기도 했다. ‘금오산을 울리는 폭포’란 뜻이다. 명금폭포란 이름은 일제강점기이던 1935년쯤 경북지사였던 일본인 오카자키데츠로(岡岐哲郞)가 지은 것이다. 폭포의 모습에 감명받아 석공을 불러 폭포 바위벽에 명금폭포란 글씨를 새기게 했다고 전해진다. 명금폭포가 아니라 대혜폭포라 불러야 하는 이유다.

금오산을 오르내리는 붉은색으로 칠한 케이블카는 낡은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고풍 느낌이다. 복고의 풍경은 그저 세월이 만든 것이지 절대 의도한 건 아니다. 언젠가 한번 교체했다는 케이블카는 오래됐으나 깔끔하다. 최근 케이블카와는 달리 앞뒤로 창 대신 난간만을 두고 있어 개방감도 뛰어나다. 이런 복고 느낌의 케이블카에서는, 세련된 곤돌라나 신식 로프웨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과거에 타봤던 추억이나 기억이 없더라도 그렇다. 최근 구미에서는 낡은 금오산 케이블카를 철거하고 신식으로 새로 놓자는 움직임이 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반세기에 가까운 유산을 내다 버린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 거대한 폭포가 세운 물기둥

이즈음 내린 잦은 비로 대혜폭포는 그야말로 장관 중의 장관이다. 폭포의 높이가 28m쯤 되는데, 물줄기가 워낙 거세서 폭포의 덩치가 훨씬 더 커 보였다. 폭포 아래 서면 사나운 기세로 지축을 울리는 물소리와 물기둥이 밀어내면서 만든 바람으로 정신이 다 없을 정도다. 폭포 저 아래까지 물이 차고 넘쳐서 흰 포말로 가득하다. 비 그친 산 아래는 폭염의 날씨였는데, 폭포 주변은 서늘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대혜폭포가 구미의 대표 명소라는 건 구미가 고향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두 번이나 찾았다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77년 9월 1일 세 자녀를 모두 데리고 구미를 찾아 금오산 관광호텔에서 묵었다. 자그마치 30년 만의 고향 방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대혜폭포였다. 박 전 대통령은 케이블카를 타고 대혜폭포를 찾았다. 박 전 대통령이 세 자녀와 함께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그날의 기념사진이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옆 민족중흥관 전시실에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듬해 추석 직후에도 작은 영애(근영)와 함께 구미 선영에 성묘한 뒤에 대혜폭포를 찾았다.

첫 번째 대혜폭포 방문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폭포 주변에 깨진 병 조각과 휴지 등이 널려있는 모습을 보고 ‘청소작업부터 시작하자’며 손수 휴지를 주웠던 해프닝이 있었다. 대통령이 몸소 휴지를 주우니 세 자녀는 물론이고 수행원들도 한참 동안 주변을 청소해야만 했다. 이날의 상황을 바탕으로 구미시는 ‘자연보호운동 발상지’를 자처한다. 박 전 대통령이 대혜폭포에서 손수 휴지를 주운 지 한 달 만에 전국 시군구 자연보호협의회가 조직됐으며, 이게 이듬해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 제정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맞는 얘기라 해도 과연 구미가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를 자처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자연보호가 ‘쓰레기 줍기’라는 일차적 자연정화였던 과거의 인식을 넘어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정책이 초래한 공장의 환경오염이나 생태에 대해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로 자처할 만큼 구미시가 관심을 기울여 왔냐는 얘기다. 아, 그리고 덧붙이는 얘기. 박 전 대통령은 두 번째 대혜폭포 방문에서 “주변이 지난해보다 많이 깨끗해져 이만하면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겠다”고 했다.

# 아찔한 벼랑 끝의 동굴

대혜폭포에 못 미쳐 절집 해운사 옆으로 아찔한 바윗길을 더듬어 가면 신라말의 고승 도선이 수행했다는 동굴인 도선굴이 있다. 도선굴은 급경사 벼랑 사면의 옹색한 계단에 난간과 쇠사슬을 달아맨 길 끝에 있다. 수직에 가까운 직벽 위에 있어 밧줄이 아니면 오를 수 없었던 기도처였는데 1937년 당시 구미면장이었던 김승동이 암벽의 돌을 깎고 쇠줄을 연결해 통로를 만들었다. 그때의 사연이 도선굴 입구 통로 암벽과 도선굴 내부 벽의 판석에 새겨져 있다.

도선굴 입구 통로에 새겨놓은 기문의 글자는 모두 11자. ‘천석통로(穿石通路·돌을 깎아 길을 만들다) 구미면장 김승동(金升東)’. 이게 제목 격이고, 도선굴 내부 벽 판석에는 이를 부연하는 본문 격인 ‘금오산 굴 통로기’가 새겨 있다. 통로기로 남겨진 글을 읽어보자. “…큰 굴이 있는데 절벽에 있어 볼 수는 있으나 오를 수가 없어 항상 유람하는 사람들의 한이 되었다. 정축년 봄에 내가 길을 열겠다는 뜻으로 의견을 내니 많은 사람이 모두 동의하였다. 이에 측벽의 돌을 깨고 쇠줄을 연결해서 굴과 통하게 했다.…내가 외람되이 면장에 있으면서 이 일을 주관하였으니 이를 돌에 새겨 후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서 경치의 한 역사를 기록하게 하노라.”

난간을 놓고 쇠사슬을 매달았으나 도선굴로 오르는 길은 아직도 아찔하다. 난간 없이 밧줄 하나만으로 오르내렸던 시절에는 여길 오르는 건 목숨을 반쯤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리라. 누군가 여기까지 올라오기로 했다면 목숨과도 바꿀 만한 간절한 기원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혜폭포도 마찬가지지만, 도선굴도 큰비가 온 뒤를 겨눠서 가는 것을 추천한다. 도선굴 옆으로 큰비가 내린 뒤에만 내걸리는 근사한 폭포가 있기 때문이다. 폭포의 이름은 따로 없다. 폭포는 도선굴 위에서 절집 해운사 뒤쪽으로 쏟아지는데, 물줄기가 가늘긴 하지만 높이는 대혜폭포의 4∼5배쯤은 족히 되는 듯하다. 쏟아지는 폭포를 끼고 아찔한 벼랑을 타고 도선굴로 오르는 느낌은 비현실적이다. 수묵화 그림이나 무협지 속 풍경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랄까.

# 무협지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자리

대혜폭포를 지나면서 금오산 산행코스의 악명높은 급경사가 시작된다. 금오산은 해발고도나 산행 거리만으로 보면 만만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쉬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급경사 구간 탓에 산행 내내 보통 지치는 게 아니다. 보통 산행 표지판에 적어놓는 산행 시간은 너그러운 편이어서 실제 산행을 하면 짧아지는 법. 그런데 금오산에서는 산 아래에서의 예상보다 산행시간이 더 길어지는 게 보통이다. 등산객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산행시간도 좀 여유를 둬야 하고 식수나 행동식 등 준비물도 잘 챙겨야 하는 이유다.

대혜폭포 옆으로 가파른 목조계단이 급경사를 차고 오른다. 길이 어찌나 가파른지 숨이 꼴딱 넘어간다는 ‘할딱고개’다. 오르는 길은 576개 계단이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고개 끝에 서면 ‘뭐 그 정도는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혹시라도 자신감을 갖거나 자신의 체력을 대견해 하지는 말기를…. 할딱고개에서 할딱이지 않았던 건, 순전히 목조계단을 놓아서 그렇다. 나무계단을 놓기 전에는 수직에 가까운 길을 거의 기다시피 올라야 하는 곳이었다. ‘할딱’이란 고개 이름도 그때 지어진 것이고….

엄밀하게 따지면 ‘할딱고개’란 이름은 틀렸다. ‘할딱’이 아니라 ‘고개’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고개라면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어야 하는데, 할딱고개가 끝나도 줄곧 급경사다. 할딱고개 이후가 오히려 더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명확한 건 할딱고개는 고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할딱고개가 아닌 ‘할딱구간’쯤이 맞을 것 같다.

할딱고개 끝에 너른바위 전망대가 있다. 구미 시내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누구든 다리 쉼을 하고 가는 곳이다. 큰비가 내린 뒤에 너른바위 전망대에서는 다른 때는 볼 수 없는 장관을 만날 수 있다. 도선굴과 도선굴 위 무명폭포의 물줄기가 해운사 머리 위쪽으로 쏟아지는 모습인데 ‘전설 속 어디쯤의 실재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다.

photo금오산 오형돌탑의 일부. 10세 때 죽은 손주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할아버지가 10년 동안 금오산을 오르내리며 깎아지른 벼랑에다 쌓은 돌탑이다.



# 간절한 기원으로 세운 돌탑

이제 펼쳐 보여줄 금오산 명소가 세 곳이 남았다. 남은 명소를 산행하며 만나게 되는 순서, 그러니까 낮은 곳에 있는 것부터 꼽아보자. 먼저 오형돌탑 얘기부터. 할딱고개를 지나 정상을 향해 가다 보면 중간쯤에 오형돌탑과 마애여래입상으로 둘러가는 갈림길이 있다. 곧바로 질러가면 정상이지만, 둘러가는 길을 택해도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정상까지 산행을 한다면 올라가는 길에 혹은 내려오는 길에 오형돌탑과 마애여래입상을 만나는 코스를 짤 수 있다는 얘기다.

오형돌탑은 깎아지른 해발 900m 남짓 아찔한 벼랑 위에 세워놓은 수많은 돌탑군(群)을 부르는 이름이다. 10년에 걸쳐 쌓은 수십 기의 돌탑은 갖가지 장식과 모양으로 가히 예술품의 경지다. 이 높은 산중에다 누가 이 긴 세월에 걸쳐 돌탑을 세웠을까.

돌탑은 장애가 있어 말하지도 걷지도 못했던 손주가 10년을 살고 세상을 뜨자, 생전에 아픈 손주를 돌봤던 할아버지가 애통한 마음으로 쌓은 것이다. 손주가 10년을 살다 갔으니, 돌탑도 10년에 걸쳐 쌓았다. 그렇다면 돌탑을 왜 ‘오형돌탑’이라 부르는 것일까. 돌탑 아래 할아버지가 쓴 친절한 설명이 있다. 금오산에서 ‘오(烏)’ 자를 가져오고, 손주 이름 형석에서 ‘형(亨)’ 자를 가져왔단다.

오형돌탑에는 탑 하나하나마다 손주가 다음 생애에는 건강한 몸으로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쌓은 탑이 ‘오형학당’ 돌탑이다. 손주가 태어나서 딱 한 번 학교에 가봤는데, 그게 못내 한이 돼서 세운 탑이다. 오형돌탑은 탑을 쌓은 의미와 쌓은 이의 정성, 그리고 탑이 가진 미감이 어우러져서 자못 감동적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다리가 후들거리는 아찔한 벼랑의 가장 끝에 아슬아슬 세워놓은 돌탑과 장식이었다. 왜 굳이 저 위험한 자리에다 돌탑을 쌓았을까. 이유를 짐작한다. 쉽게 쌓은 탑이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할아버지의 돌탑 쌓기가 고행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더 어려울수록 더 고될수록 소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이 지금의 돌탑을 만들었다. 그 돌탑이 보여주고 있는 건 못다 한 사랑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소망의 힘이다.

photo바위 모서리를 깎아서 새겨 입체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 약사암, 금오산 경관의 절정

오형돌탑을 지나면 이내 마애여래입상과 만나게 된다. 마애여래입상은 삼형제라 부르는 금오산의 세 개 봉우리인 현월봉과 약사봉, 보봉 중 막내 격인 보봉 아래 있다. 산중의 마애불은 그리 드문 건 아닌데, 금오산의 마애여래입상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가장 특별한 건 한쪽 면과 다른 면이 수직으로 만나는 암벽의 툭 튀어나온 모서리를 깎아서 연꽃 대좌 위에 광배를 두르고 선 부처를 정성껏 새겼다는 것이다. 평면이 아닌 모서리에 돋을새김으로 새겼으니 마애불은 저절로 입체적이다.

대좌부터 광배까지 마애불의 높이는 5m 남짓이다.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다. 마애불은 너무 투박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세밀하지도 않다. 너무 크면 압도감은 있지만 감정이입이 어렵고, 너무 작으면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투박하면 믿음이 안 가고, 세밀하면 종교적 장중함이 모자란다.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 가진 위엄과 푸근함은, 새겨진 자리부터 크기와 기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건이 만들어낸 결과다.

마애불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잡고, 왼손은 팔꿈치를 살짝 구부려 상체에 붙이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 여원인(與願印)이다.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준다는…. 마애불이 새겨진 건 10세기 중엽 고려 때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서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서 있었던 게 자그마치 1000년이다. 1000년이 지났어도 마애불 앞의 제대(祭臺) 유리 상자 안에는 오늘도 기원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

photo금오산 정상 현월봉에 놓인 금오산 정상표지석. 미군 레이더기지가 있던 정상부지를 반환받아 2014년 새로 설치했다.



이제 금오산 경관의 절정에 대한 얘기다. 금오산 최고의 풍경은 단연 정상의 이마쯤에 있는 암자, 약사암이다. 약사암은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 바로 아래 기이한 암봉 사이에 들어서 있다. 정상 직전의 갈림길에 느닷없이 ‘동국제일문(東國第一門)’의 현판을 붙인 일주문이 나타나는데, 암벽 틈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암봉 아래 약사암이 있다. 암자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절터의 내력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약사암은 실은 암자에서 바깥을 보는 풍경보다 정상인 현월봉을 넘어 약사봉 맞은편 바위 능선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훨씬 더 빼어나다. 암릉 위에 올라앉아 울퉁불퉁 솟은 약사봉의 우람한 바위 봉우리와 그 아래 제비집같이 매달린 절집, 그리고 뒤로 아득하게 낙동강 물길과 구미 시내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맛이 최고다. 이 딱 한 장면만으로도 힘든 산행은 너끈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거기 오르시거든 되도록 오래 머무시기를…... * 자료제공 : 문화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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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1 14:11:25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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