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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위기에 처했을때의 호국불교

 


 

승병 [僧兵]  

승려들로 조직된 조선시대의 비정규군대. 
승군(僧軍)이라고도 한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도승이 많아짐에 따라 유사시에는 이들도 출전하였다.

원래 불교는 살생을 금하나 한국의 불교는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호국신앙과 결부,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고려에 들어와서 외적의 침범이 빈번해지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승병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는데, 고구려 때 (唐)나라 태종(요즘 연개소문의 이세민)이

침입하자 고구려의 승려 3만 명이 승군으로 출전하였다는 내용이 《고려사》

<최영전(崔瑩傳)>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내외사원(內外寺院)에는 수원승도(隨院僧徒)라 하여 군현의 주민처럼 사원에 부속되어

항상 노역(勞役)에 종사하면서 항산(恒産)을 누리고 사는 자가 많아서 유사시에는 이러한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승병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 수원승도로 조직된 승병을 항마군(降魔軍)이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승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영규(靈圭) ·처영(處英)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때의 승병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지휘하에 왜군과의 싸움과 축성공사에 참여하였다. 
 출전:http://100.naver.com/100.nhn?docid=100034

 

승군(僧軍)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자 승려로 구성된 군인.

그 기원과 활동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에선 수나라 대군이 침입했을 때 살수의 강물을 막아 수공작전을 도모하였던
을지문덕 장군을 도와 7명의 승려들이 적을 유인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라:에선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했을 때, 승려 도옥(道玉)이 결성한 결사대가 적을

공략하여 신라에 승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백제:에서는 나라가 멸망한 후 도침이 패잔병을 재조직하여 백제의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승군의 활동은 고려:시대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이 수도인 서경을 침략할 때 승장 법언(法言)은 9천명의 승병을 이끌고

거란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1104년(숙종 9)엔 승군이 항마군(降馬軍)이라는 명칭으로 정규군에 편입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소환되었다.

(조선 유교국은 서울 4대문에 출입을 금지당한 승려들이었다.)

 

1174년(명종 4) 이의방(李義方)의 반란,

1176년 공주에서의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의 반란,

1182년 죽동(竹同)의 반란에서도 승군의 역할이 컸으며,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이 서북쪽 국경을 침범하였을 때 승군 수백명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승장(僧將) 김윤후(金允候)는 몽고 침입 때 몽고 장군 살례탑(Salistai)을 활로 쏘아 죽였고,

충주산성을 70일간 수호하여 적을 퇴각시켰다.

또 몽고의 5차 침입 때엔 승장 홍지(洪之)가 상주산성을 지키면서 적의 지휘관을

사살하고 적을 패배시켰다.

 

고려 말기:에는 승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1359년(공민왕 8) 12월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전국의 사원이 말을 군용으로 징발시켰고,

승군이 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막았다.

 

1378년 3월, 왜구가 수도 개경을 공략하자 수천명의 승군이 병선의 제조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1388년 4월에도 승군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억불정책(불교탄압정책)을 시행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 초기엔 승군의 조직도 허용되지 않았으나,

무자격증의 승려(無度牒僧)를 환속시키는 방법으로서 승군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자격증의 승려를 승군으로 동원하여 성곽이나 요새를 축조하게 한 뒤, 그 대가로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무자격, 유자격 승려를 가리지 않고 모두 승군으로

동원하였으며, 왜변이 끝난 후에도 수년 동안 배를 만들거나 성을 축조하는 일에 동원하였다.

 

임진왜란의 눈부신 호국활동

*.아래 휴정과 유정스님 관련 주석 참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승군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휴정(休靜)은 전국 사찰에 국토의 방호를 호소하는 격문(Manifesto)을 보냈고,

승병 천오백명을 조직하여 승군총사령관(8도 都總攝)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전투는 영규(靈圭)의 청주성 탈환,

처영(處英)의 행주산성 승리,

그리고 평양 탈환 때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수행된 모란봉 전투와 수도 수복 때의

수락산 전투, 노원평야 전투, 송교전투 등을 꼽을 수 있다.

 

휴정의 제자인 유정은 이해 7월 왕으로부터 도(都) 사령관의 임명장을 받았다.
(관군이 거의 다 패퇴할 때 승군의병이 승리를 거듭하자 왕이 내린 벼슬)

처음 강원도에서 출발할 때는 150명에 불과했던 승병이 황해도를 거쳐 평양성 동쪽에 이르렀을

때는 700명이 넘었고, 다시 법흥진(法興鎭)에 이르렀을 때는 총 병력이 5천명에 이르렀다.

(모두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조선 불교 승려들의 불타는 애국심의 증거다.) 

 

법흥진 승군은 평양탈환 직전인 11월부터 평양과 중화지방의 적군을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했으며,

평양탈환을 위한 전투에선 유정의 지휘 아래 난공 지점인 모란봉을 맡아 대승을 거두었다.

승병들은 평소 산악지대의 지리와 지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평양탈환 후에도

북관(北關)에서 적의 동태를 정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의병과 달리 승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부에 의해 해체되지 않았고, 군량미를 수송하거나

성을 쌓는 일을 담당하는 등 준-정부군의 형태로 바뀌었다.

일본과 7년의 전쟁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승군이 활약했으며 대표적인 예로서는

전라도 무주지방에서의 전투와 경기도에서의 죽산전투를 들 수 있다.

유정은 수도가 수복된 후에도 영남지방에서 왜구와 싸웠고,

도산성(島山城) 공격과 예교총(曳橋總)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승병장으로는

휴정스님, 유정스님, 영규스님, 처영스님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법견스님(法堅)은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데 공헌했으며,

행사스님(行思)는 정보를 담당했고,

영주스님(靈珠)는 죽산성을 쌓았고 그 성의 수비대장을 맡았다.

견우스님(見牛)는 용진의 월계산성(月溪山城) 구축의 책임을 맡았고,

해안스님(海眼)은 경상도에서 봉기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며,
인오스님(印悟)와 천연스님(天淵)은 평양 탈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법정스님(法正)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수비대장으로서 명성을 떨쳤고,

혜희스님는 여천 지방의 무기고 수비에 기여했으며,

의능스님(義能)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해군에 편입되어 작전에 참여했다.

의엄스님(義嚴)은 서산대사(휴정)의 뒤를 이어 승군 사령관이 되었고 파사성을 축조하였다.

설미스님(雪尾)는 의승(義僧)을 모집하여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신열스님(信悅)은 경상우도 승군 사령관(도총섭)이 되어 군량미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고,

해인사에서 무기를 만들어 의승군에게 보급하였으며 첫번째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 병자호란 때는 각성스님(覺性)과 명조스님(明照) 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

1624년(인조 2)에 8도의 총사령관이 된 각성은 남한산성을 축조하였으며,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항마군이라고 이름하는 3천명의 의승을 모아 수도로 진군하였으나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명조스님은 의승군 4천명을 이끌고 안주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군량미를 모아 전선에 보급하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 승군들은 산성의 축조와 방호에 힘썼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남한산성의 남한치영(緇營)과 북한산성의 북한치영이다.

각성의 감독하에 축조된 남한산성 내의 치영은 각 도에서 소집된 의승들이 초소를 지켰으며,

성 안의 9개 사찰의 승군들이 성을 지켰다.

1711년에 축조된 북한산성 내에는 중흥사를 중심으로

태고사, 노적사, 서암사, 경흥사, 국영사, 원각사, 부황사, 보광사, 보국사, 용암사, 봉암사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 사찰에 머물고 있는 승군들이 산성을 수호하였다.

 

이들 치영 외에도 역대의 왕조실록을 보관한 장소 가까이 있는 사찰인 강릉 월정사, 무주 적상산성,

봉화 각화사, 강화도 전등사에 승군을 두어 실록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이 승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승군제도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온 한국에서 불교가 국가와 민족의 수호·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한국불교의 특징의 하나인 호국의 이념의 발현이라고 평가된다. 

 

 

 




 

2019.11.03 14: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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