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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 금강경 강해 제5분 여리실견분2





[법상스님의금강경강의] 제5분 여리실견분(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금강경의 제일사구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구게야말로 금강경 전체를 아우르고,
일체 모든 경전의 진리를 아울러 담고 있는
불교의 핵심 경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게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하며 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해 놓은 게송입니다.

그러면 이 게송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범소유상’이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주체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다시말해, 눈귀코혀몸뜻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고,
몸으로 감촉되며 뜻으로 헤아려 지는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개시허망’이란
일체가 다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범소유상이 다 개시허망이다.
이 세상에 형상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공(空),
인연(因緣), 중도(中道),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으며,
고정된 자아가 없고, 괴롭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하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는 이유는
다 인연의 가합이라는 말입니다.

인연이 가합되어 가짜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니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무집착, 무소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는 이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 현상계의 본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여 어느 하나 참된 것이 없고,
항상[常]하거나 즐겁거나[樂]
고정된 자아가 있거나[我] 깨끗하지[淨]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인 것을 바로 알아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한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련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이진 적멸의 자리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룻밤 꿈을 꿀 때,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나고 죽기도 하며,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행을 벌이고 있지만
딱 꿈을 깨고 보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다만 꿈이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답답해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 현실 세계 또한 꿈인 것입니다.
꿈이며 신기루고 환상이며 물거품인 것입니다.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고 환상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설사 이 지구가 몇 번 멸망을 하고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여전히 본질에서는 적멸이고 지고한 평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인 것입니다.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음을,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어느 하나 실체가 없음을,
다만 인연이 거짓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란 말입니다.

그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맵니다.
이것이 우리들 괴로움의 실체입니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이 게송의 소중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고,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디기 붙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광대무변하며
성성적적 무량한 깨달음이
바로 금강경 제일사구게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역의 해석을 살펴보면
구마라집 번역에서 보이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조금 달리 해석하고 있는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상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모든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처님의 32상 이라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참된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32상이라는 모양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모양이 아닌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침 없이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상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도록 이끄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또한 결국에는
구마라집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두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18.02.20 15:19:57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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