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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큰스님 일화 모음

 
 
 
춘성스님 일화 모음. 춘성 스님이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경찰이 주소를 묻자 “우리 엄마 보지다”라고 대답했다. 
  “본적은?”    “우리 아버지 자지”        

       
2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어느 날 춘성 스님은 육영수 여사의 생일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불자인 박 대통령과 육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춘성 스님은 마이크 앞에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30분이 넘어서 결국 참가자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춘성 스님은 갑자기 법문 한 마디를 하였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         

     
3        
소견이 몹시 좁은 딸을 둔 노 보살이 있었다. 
하루는 이 장성한 딸을 춘성 스님 처소에 보내서 소갈머리가 좀 터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다. 춘성 스님이 딸에게 말했다.         
“내 그 큰 것이 네 그 좁은 데 어찌 들어가겠느냐?”         

 딸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달아났다. 
집에 돌아와서 노보살님에게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고, 
“큰스님은 엉터리요” 라며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다. 
그러자 노 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며 혀를 찼다. 
딸은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스님의 소중한 법문을 잘못 알아차린 줄을 알았다.         

       

4        
춘성 스님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타셨는데, 그당시에도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을 써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스님이 타신 칸에
 우르르 몰려타더니 왠 늙은 중이 앉아 있으니 한 광신자가 스님앞에 오더니 하는 말,        
"죽은 부처를 믿지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를 믿으시오.그래야 천국갑니다."        
그러자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춘성스님이 기골이 
장대하셨던 분인지라 필시 한 대 패줄 것이라 기대를 하고 잔뜩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춘성스님이 그말을한 사람을 올려보더니 "부활이 뭔데?"하고 묻자 
그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요,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예수님을 믿으시오." 했다.         
춘성스님이 그사람을 빤히 쳐다 보더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게 부활이라고?"  
예수쟁이가  "그렇소."라고 말하자 춘성스님이 그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럼 니는 내 좆을 믿어라, 내 좆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니는 내 좆을 믿거라."        
큰싸움이 날걸로 알고 있던 전차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5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 방범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중대장이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순경이 풀래시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닌 어떤 스님이었다.
"아니, 스님이 아니시오?"하고 묻자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6        
춘성 스님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함께 탄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다.         
춘성이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데가 없다는 말이냐?”         
“그러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춘성을 노려보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화를 내며 물었다.         
“부처님도 없는 데가 없느냐?”         
“없는 데가 없지!”         
“그러면 부처님도 똥통 속에 있겠네?”         
“똥이 부처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말할 것이 뭐 있어?”         

 
7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다. 
스님은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에 가득 찬 냉수가 얼어 
항아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춘성 스님은 참선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찬물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
 머리만 내밀고 앉아 정진을 했다.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들어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 스님은 쾌재를 불렀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수행자로서 춘성 스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었고 서릿발 같은 분이었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춘성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수행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야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아라!”         

춘성 스님은 기어이 젊은 수좌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분이 바로 춘성이었는데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법문을 남기기도 했다
.“시집 장가가는 데는 보지와 자지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8        
하루는 제자가 스님에게 질문했다.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야 이놈아,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9        
춘성 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학이 스님에게 물었다.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스님은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학이 다시 물었다. 
"스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 라고 하자 춘성 스님 왈        
"이놈의 자식아!   신도 위해 사냐?"        

 스님은 입적 후에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는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 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현 봉은사주지) 스님을 비롯한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음> 등을 부르며 
노래자랑을 벌였다고 한다.           

       

 10.        
스승이 감옥에 계시는데 어찌 더운 방을 쓰랴        
춘성은 만해 스님이 기미년 독립선언서에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 
33인 중의 한분으로 왜정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자, 
지극정성으로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춘성은 스승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엄동설한에도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은 채, 냉방에서 견디고 있었다.        
이때 그 절에 찾아왔던 다른 스님이 돌아보니 절에는 땔감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을 때지 않은 채 냉방에서 자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해서 춘성에게 물었다.        
"아니, 저렇게 땔감이 많이 있거늘 어찌하여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고
 냉방에서 덜덜 떨면서 자는 게요?"        

"그야 물론 장작이야 넉넉히 있지요. 허나, 스승께서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지금 서대문 형무소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실 텐데, 
제자인 내가 감히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나오시기 전에는 결코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을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겨우내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았다.        

       

 11.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춘성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거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스님도 춘성을 제자로 늘 자랑했고, 
춘성 또한 만해 스님의 제자임을 당당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만해 스님이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제자인 춘성이 추위에 고생하시는 은사 만해 스님을 위해 
두툼한 솜바지 저고리 한 벌을 지어 가지고 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내복도 없던 시절, 홑옷만을 입으신 채 형무소 바닥에서 엄동설한에 고생하실 
스승을 염려한 나머지 제자 춘성이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온 솜바지저고리였다.        

제자가 만들어온 새 솜바지저고리를 넣어드리자 만해 스님이 제자에게 물었다.        

 "이것 보아라. 이 솜바지저고리를 만들라면 수월찮은 돈이 있어야 할 텐데, 
그대가 도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비싼 솜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왔느냐?"        

"스님, 염려마시고 따뜻하게 입으십시오."        

"무슨 돈으로 만들었냐고 물었다. 
대체 무슨 돈으로 이 솜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왔느냐?"        

"사실은 ... 달리 돈을 마련할 길이 없기에 절에 딸린 텃밭을 팔아 
그 돈으로 이 솜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걱정 말고 입으십시오."        

 "너 이놈! 절에 딸린 텃밭은 부처님 재산이거늘, 
그걸 감히 네 마음대로 팔았단 말이더냐?"        

 "텃밭은 나중에 다시 사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될 소리! 너는 부처님 재산인 사중 땅을 사사롭게 쓰기 위해 
함부로 팔아먹었으니 죄 중에도 큰 죄를 지었다. 
나는 너 같은 상좌를 둔 일이 없으니 오늘부터 당장 내 제자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말라!"        

만해 스님은 이렇게 매섭게 제자를 꾸짖고 정성들여 만들어온 
솜바지저고리 받기를 거절했다.................        

그 후로는 누가 물어도 춘성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은사가 안 계십니다 "


다 버리고 마음 하나만 밝혔던 선승

춘성 스님은 열세살 때 부모님께 당당히 출가의사를 밝히고 백담사에서 
만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의 유일한 상좌였다.
 만해 스님에게서 경을 공부하고 25세에 이르러 평안도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
 이후 강학을 전공하여 강백으로서 전국의 운수납자들을 들끓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스님은 손에서 경을 놓고 만공 스님 회상에 들어가
 장좌불와 수행 끝에 무애 대자유인이 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거기에 전해져 오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만해 한용운 스님이 춘성 스님을 부르더니
 “너는 장가도 가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마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춘성 스님은 그 까닭도 묻지 않고 ‘네’ 하고 답했고, 그 길로 스님은
 공부와 연을 끊고 참선인의 길로 들어서 입적하는 날까지 배운 바 하나 없는 
노승의 모습으로 머물다 갔다. 춘성 스님의 단박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좌의 입장에서 보면 춘성 스님은 시봉하기에 그리 쉬운 스승은 아니었던 듯싶다.
 무엇보다 당신 마음에 어떤 잔상도 남기지 않는 탓에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순간 일어난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
 주변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는 당신은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곤 했으니 
상좌스님으로서는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땐가 하안거 해제날이었습니다. 스님이 마을에서 맥주 두 박스를 시켰어요.
 그 동안 공부 열심히 했으니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라고 말이죠. 
지금도 놀랄 일인데 그때는 기절할 일이었습니다.
 다들 스님이 따라준 맥주잔을 들고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마실 수도 없고, 안 마실 수도 없고…. 결국 스님 호통에 못 이겨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마셨죠. 그런데 그러고 나서
 스님께서 느닷없이 법문을 하시는 겁니다. 오늘 먹은 것만큼 더 공부해라.
 그때 그 말씀이 얼마나 서릿발 같고 무서웠는지…. 참 특별하신 어른이었습니다.” 


춘 성 스님의 삶과 수행은 수많은 기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늘 수명 스님이 있었다. 누가 글을 써달라고 찾아오면 
춘성 스님은 서예를 잘하는 수명 스님을 자랑하며 대신 쓰게 했고, 
곡차를 찾으면 곡차를 대령했고, 양복을 입고 싶다 하면 양복을 대령했다. 
수명 스님은 춘성 스님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면 ‘네’라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저히 들어드릴 수 없는 말일지라도 수명 스님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다. 
다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드리려 애쓸 뿐이었다. 
“왜냐구요? 물론 그 행동의 연유를 저희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른은
 가장 맑고 청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 그것만은 알 수 있었거든요.” 
춘 성 스님이 열반에 드시기 얼마 전 수명 스님은 노사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었다 한다. 그런데 비행기에 올라탄 지 10여 분 정도 경과했을까. 
갑자기 춘성 스님이 내리겠다며 걸망을 지더란다. 
수명 스님이 깜짝 놀라 비행기는 기차가 아니라 내릴 수 없다고 노사를 설득하자,
 춘성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비행기는 떴다 하면 바로 내린다고 들었다. 벌써 10분이 지났는데 왜 못내리느냐.” 
천진했던 은사의 모습을 그리며 수명 스님은 뜰 밖을 내다보았다. 
이십년 전 바라산에 서광사를 창건하면서 데리고 온 어린 잔목들이 이렇게
 울창해졌노라고 스님은 이야기를 돌린다. 
빽빽하게 올라선 대나무며 감나무 느티나무가 벌써 가을 운치를 자아낸다. 
“우리 스님이 당부했던 건 세 가지입니다. 
주지하지 마라. 총무원에 들어가지 마라. 독방 쓰지 마라. 
아마 우리 스님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저는 많은 것을 욕심내며 살고 있을 거예요. 
제가 욕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우리 스님 만난 것….” 
도량 구석구석의 작은 나무들로 안내하는 스님 뒤를 따르며,
 어쩐지 수명 스님이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했던 춘성 스님의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고 천진하고 환희로운 모습이 그곳에 여울져 있었다. 


2020.12.05 15:52:54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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