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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 三法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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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idsee8512    
애국 (mcidsee8512)
제행무상 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제법무아 諸法無我 변하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
일체개고 一切皆苦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
여기에 열반적정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이 네가지를 넣어 사법인 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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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생애 제10강 / 마음의 거문고가 ...






* 10강 : 마음의 거문고가 울리는 세상



왕사성에는 영축산(靈鷲山)이 있다. 이 산은 독수리산으로 불리며 영산회상(靈山會上)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불보사찰로 유명한 통도사가 있는 산 이름이 바로 영축산인데, 바로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지명, 산명 등이 부처님께서 태어나 가르침을 펴신 인도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이 영축산에 머물 때의 일이다. 소나라는 비구가 근처의 숲속에서 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수행에 정진하였으나 지나치게 긴장된 수행을 하는 탓인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좀처럼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자기보다 수행을 적게 하는 사람도 깨달음에 쉽게 도달하는 것을 보고 조급해진 그는 차라리 집에 가서 재산이나 상속받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마음을 퇴굴심(退屈心)이라고 하는데, 수행 시 조급한 마음에서 흔히 생겨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아이고! 나는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서 수행에 장애가 된다. 이렇게 남을 쳐다보고 자기와 비교하는 마음은 소아적인 마음이다. 이런 소아적인 마음을 비우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소나는 이런 퇴굴심을 내었기 때문에 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는 부처님은 그를 찾아가 물었다.
“소나여, 공부는 잘 되는가?”
“아닙니다. 실은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소나에게 물었다.
“소나여, 너는 집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다지?”
“예, 좀 탔습니다.”
“거문고를 탈 때 줄이 너무 팽팽하면 소리가 어떠하더냐?”
“물론 잘 안 납니다.”
“그래, 그럼 반대로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떠하더냐?”
“그래도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소리가 잘 나느냐?”
“너무 팽팽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고 줄이 적당해야 훌륭한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소나여,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수행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이 격앙되어 조용하지 못하고, 또 너무 느슨하면 게으름에 빠지게 되느니라. 따라서 소나여, 그 중도를 취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듣고 소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성격과 내용을 헤아려볼 수 있다.
 
첫째로, 부처님은 항상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적절한 비유로 가르침을 펴신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의 의미를 쉽게 깨칠 수 있었다. 소나에게 거문고를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부처님이 소나의 평소 생활을 관찰해서 그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에 알맞은 설법을 펴신 것이다.

둘째로, 부처님은 항상 중도적인 실천을 강조하신다. 즉,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하면 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수행에 있어서도 너무 조급하거나 게으르게 되면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중도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말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 용어이다.
먼저 중도는 사상적 중도로서 깨침에 기본해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적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고정불변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 바탕이다.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연기(緣起)요 공(空)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책이 있다고 하자. 흔히 우리는 이 책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이 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공(空)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공이면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이란 ‘있다’, ‘없다’라는 양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일관된 입장이다.

부처님은 쾌락이나 금욕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강조했는데, 여기에서 구체적 수행 자세를 가르치고 계신다. 수행이 너무 조급해도 안 되고 또 너무 완만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조급하면 들뜬 마음이 되어서 안정이 되지 않고, 또한 완만하면 마음이 착 가라앉아 멍청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중도는 이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밝게[惺惺寂寂] 즉,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실천중도이다.

또 중도는 둘 사이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 어떤 고정된 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일정하게 평정을 유지하여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자유로운 모습이다. 한 쪽으로 기울면 다른 쪽을 북돋아 주고, 저 쪽으로 넘치면 그 쪽을 덜어주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신다면 “조금 조이고 더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실 것 같다. 또한 “고행을 좀 하라.”고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너무 나태하고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소나에게 거문고에 비유해서 수행의 태도를 설명하신 것은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거문고 조율을 잘해 가는 공부와 같다. 거문고를 잘 조율하여 현묘한 가락이 울려 퍼지는 상태가 바로 열반이요, 해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 퍼지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계가 바로 불교의 이상인 불국정토이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知訥) 스님은 신라의 원효 스님과 함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다. 지눌은 12-3세기경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타락한 고려불교를 바로잡고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아우르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지눌 스님은 우리 마음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들을 들고 있다. 그 여러 이름 가운데 아주 흥미 있는 이름이 무진등(無盡燈)이란 이름이다. 이것은 다함이 없는 등불, 꺼지지 않는 등불로서 항상 밝음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이 등불은 전기나 인위적인 등불이 아니라 우리 본래 마음의 등불이기 때문에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그래서 24시간 항상 환하게 비추는 아름다운 등불이다.
 
또한 마음에 대한 멋진 표현으로서 ‘줄이 없는 거문고’라는 뜻의 몰현금(沒絃琴)이라는 이름이 있다. 거문고는 여섯 줄이 있어서 현묘한 소리를 내는데, 줄이 없다면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거문고는 줄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영원한 가락, 무한한 음악, 열반의 묘악(妙樂)을 연주할 수 있다. 여섯 줄의 화음은 아름답지만 그 이상의 소리를 낼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줄이 16줄, 160줄로 늘어난다 해도 줄이 있는 한은 유한의 음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아예 줄이 없는 거문고이다. 줄이 없기 때문에 무한한 음악, 음악 중의 음악을 낼 수 있다. 이 음악은 평화의 가락이다. 이런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진정한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 그런 ‘줄 없는 거문고’, ‘마음의 거문고’를 심금(心琴)이라고 부른다. 흔히 ‘심금을 울린다’고 할 때의 심금을 가리킨다. 심금이 울리면 그 인간관계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깊은 차원의 이해와 공존이 있게 된다.

불교는 그런 마음의 거문고를 타자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심금은 줄이 안 맞는 상태에 놓여 있다. ‘나다’ 하는 생각과, 탐·진·치 삼독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입은 험담이나 비난, 거짓말, 이간하는 말, 아부하는 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잡음과 불협화음이 생긴다. 우리들의 행동을 보더라도 역시 불협화음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해치며, 다른 생명을 천시하고 또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등 온갖 좋지 않은 행위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위는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개인적으로는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고, 사회적으로는 계층 간의 갈등이나 분규, 범죄들이 만연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나아가 자연의 생명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세상이 다름 아닌 예토(穢土)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거문고를 잘 타자는 것이다. 심금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사회 등 온 누리에 울려 퍼질 때, 불국정토는 완성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마음의 거문고를 잘 조율해서 묘한 가락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다’ 하는 생각, 탐·진·치 삼독을 비우는 일이다. 매사에 텅 빈 마음[無心]이 될 때, 잡다한 생각은 사라지고 순일한 마음, 하나인 마음이 드러난다. 이럴 때 심금은 울려 퍼진다.

매사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불공’이다. 부처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불공을 드려야 할까? 바로 하나인 마음으로 불공을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하나인 마음이 될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매우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순일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이른바 독서삼매에 들게 되며, 이럴 때 바로 가장 창조적 독서가 된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순일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이해의 가락, 평화의 가락인 심금이 울려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에 퍼지게 되면 창조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런 창조적 만남 속에서 깨끗한 땅, 한번 살아볼 만한 세상은 건설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소나에게 주신 가르침이나 지눌이 말한 몰현금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이런 하나인 마음, 중도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 모든 사람을 예경하라

순일한 마음으로 모든 이에게 정성을 다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왕사성의 젊은 청년 싱갈라[善生]에게 준 가르침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 주제가 우리들이 매일매일, 순간순간 경험해 가고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는가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그러면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아침 일찍 성 안으로 탁발을 가셨을 때 한 젊은이가 목욕을 하고 동서남북 그리고 상하의 육방(六方)을 향하여 열심히 절을 하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싱갈라였다. 기이하게 생각한 부처님께서는 그 까닭을 물었다.
“젊은이는 무엇 때문에 아침마다 예경을 하는가?”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육방을 향해 매일 예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언에 따라 매일 아침 여섯 방향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덮어놓고 육방을 향하여 절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알고 행해야 참다운 예경이라고 하면서 자상한 가르침을 주셨다.
 
동쪽은 부모님을 가리키고, 서쪽은 아내를, 남쪽은 스승을, 북쪽은 친족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래쪽은 아랫사람을 가리키고, 위쪽은 윗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육방에 예를 표한다는 것은 그 모든 사람들을 잘 받들고 모시는 것이며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싱갈라경』 또는 『선생경(善生經)』 혹은 『육방예경(六方禮經)』이라 불리는 유명한 경전에 있는 가르침이다. 경은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아내와 남편,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실천의 구체적 덕목들을 자상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위의 가르침만으로도 바람직한 인간관계, 바람직한 만남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육방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형식적인 종교의례나 실천에 새로운 의미와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싱갈라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전에 육방에 예경을 드린 것은 단순히 외형적인 움직임이었다. 이 움직임은 단지 형식화된 미신에 불과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동서남북, 상하는 단순한 물리적 방위가 아니라 각기 부모·아내·스승·친척·윗사람·아랫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방에 대한 예경은 그들을 잘 받들고 모시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이를 통해 그 육방예경은 삶의 거룩한 몸짓으로 살아난다.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자세, 만남의 자세는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예경하라는 것이다. 싱갈라는 매일 아침 목욕재계하고 육방을 향해 절을 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목욕재계하고 절하듯이’ 예경하라는 것이다. 그런 예경은 바로 부처님을 받들고 모시는 불공의 자세가 아닐까.

실은 우리가 매일같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 우리의 부모님, 형제, 아들 딸, 스승, 제자, 친척들, 아내, 남편, 나아가서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예외 없이 다 부처님들인 것이다. 단지 우리가 눈이 가리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런 산부처님들을 잘 받들고 섬기는 산 불교, 참 불공법을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 불공, 예경의 핵심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만남 만남에 우리들 마음을 다하는 것,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할 때 그것이 부모를 향해 나타나면 효(孝)요, 친구 간에 나타나면 믿음이요, 스승을 향해 나타나면 스승 공경인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불공을 드릴 때 감응(感應)이 따르듯이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감응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즉, 내가 정성을 다할 때 상대방의 마음이 호응을 하게 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심금(心琴)이 울리는 것이다. 마음의 거문고는 그런 마음의 감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마음의 거문고, 평화의 가락은 오직 마음을 다 하는 솜씨로만 켤 수가 있다. 그런 가락, 마음의 거문고를 타는 방법을 부처님께서는 보여 주고 계신다. 그 방법은 바로 ‘목욕재계하고 절을 올리듯’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받들고 모시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의 토대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일체의 모든 것은 ‘더불어’ 있다는 연기의 진리에 기본을 두고 있다. 이는 마치 볏짚을 서로 기대 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것도 쓰러진다는 상보적인 공생, 공존의 원리이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고용주와 일하는 사람,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연기적이다. 그래서 부자, 부부, 노사, 사제 간의 관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원리, 평화와 공존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 목욕재계하고 절을 올리듯 받들고 모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이 모두 나와 더불어 함께 있는 부처님들이기 때문이다.

혹 아버지 부처님, 어머니 부처님, 남편 부처님, 아내 부처님을 미워하고 천대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겠다. 그들을 잘 받들고 섬기는 일이 참 불공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불공을 가르치고 계신다.

 
* 나도 밭 갈고 씨 뿌린다

부처님이 마가다국의 에카사라라는 마을에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 봄날 부처님은 아침에 탁발을 나갔다가 한 바라문의 집에 다다르게 되었다. 마침 씨 뿌리는 시기여서 바라문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씨를 뿌리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보고서 이렇게 물었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내가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스스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상당히 도전적인 항의였음이 분명하다. 출가한 사문들이 탁발로 생활하는 것이 그 시절의 관습이었지만 ‘농사짓고 일해서 먹고살아야지, 왜 놀고먹느냐?’는 가시 돋친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 갈고 있소. 나도 밭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소.”
“사문이여, 우리는 아무도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대체 당신의 쟁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밭을 간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지혜는 밭을 가는 쟁기
나는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나날이 악한 업을 제거하나니
그것이 내가 밭에서 김을 매는 것이니라.
 
내가 모는 소는 정진이니
가다가 돌아섬 없고
행하여 슬퍼함 없는 평안한 경지로다.
나는 이렇게 밭 갈고 씨 뿌려
감로의 열매를 거두노라.
 
부처님은 우리의 신행이 어떠해야 할지를 농사짓는 일에 비유하여 잘 보여 주고 있다. 황무지를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돌과 장애물 등을 치우고 땅을 갈아 파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물도 끌어 대고 김도 매주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통해 알찬 수확은 비로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밭을 일구어 해탈의 열매를 수확하는 일도, 여러 과정을 거치며 꾸준한 정진이 필요하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지혜의 쟁기로 마음 밭을 가는 일이다. 마음 밭에 쌓인 어쭙잖은 생각들, 삼독의 장애물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워지는 첫 출발이 다름 아닌 지혜의 쟁기질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믿음의 씨, 진리의 종자를 뿌리는 일이다. “진리대로 살겠습니다. 참답게 살겠습니다.” 하는 간절한 발원이 그것이다. 그것은 또 다름 아닌 귀명삼보(歸命三寶)의 씨앗이다.
그 진리의 씨앗을 잘 가꾸고 성숙시키기 위해 소걸음의 정진이 없어서는 안 된다. 비록 빠르지는 못하지만 육중한 체중을 싣고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걷는 소의 걸음걸이, 그것은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해 가는 미더운 모습이 아닌가. 그런 정진을 통해 얻는 수확이 바로 감로(甘露)의 열매요, 해탈의 과일이다.
91     부처님 생애
 
끝으로, 이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정신의 연원을 보게 된다. 즉, 백장청규(百丈淸規)로 알려진 이 전통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나도 밭 갈고 씨 뿌린다.”는 말씀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과연 마음 밭을 잘 개발해서 감로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까? 한번 점검해 보도록 하자.


2019.09.21 12: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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