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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원의 대념처경 강해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먼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분리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대상의 바른 성품을 보지 못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대상을 볼 때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무상, 고, 무아의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가 없어서 지혜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실재를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대상을 붙잡기 위해서

관념을 보는 것으로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대념처경의 서언(序言)을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하 까삿빠 존자가 대념처경에 관하여 질문을 하자

아난다 존자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로 시작하여 답변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아난다 존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증명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가 아니고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라고 부처님의 말씀을 앞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분이 부처님의 말씀을 최종적으로 정리 하셨고 가르침을 지침으로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이 그 자신이 지어낸 것이 아님을 밝히고,

전에 부처님께서 발언한 말씀들을 들었음을 발표함으로써,

그분은 천인들과 인간들의 법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격파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부처님의 면전에서 내가 배운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나 관념, 문구나 음절에 대해 주저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는 들었습니다.’ 라는 말은 매우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말을 한 아난다 존자의 말이 아니고

그 모든 말씀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 때 거룩하신 분이 꾸르스 지방의

깜마사담마라는 상업도시에 계셨습니다.”


여기서 ‘한 때’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설법이 전달된 정확한 시점을 아난다 존자는 알고 계셨지만

간결함을 위해서 ‘한 때’ 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그것이 아마도 노력의 전략이었겠지만

다른 시대에 속하는 우리에게는 분명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시간과 어느 연도에

이 법을 가르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난다 존자가 이 모든 것을 상세히 전했다면

우리는 이 설법과 모든 가르침을 연대순으로 정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설법들이 다른 것들보다 먼저 가르쳤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언제, 어느 때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간을 뛰어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꾸르스 지방’ 이라고 지방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꾸르스는 인도에 있는 어느 지방이나 작은 나라 이름입니다.


꾸르 지방 주민들은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꾸르 지방의 비구와 비구니, 남녀 재가자는

아주 좋은 기후 등의 조건을 갖추고 살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기후조건 등으로 인해 그곳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항상 건전했습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통찰지의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심오한 법문을 파악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심오한 법문을 파악할 능력을 가졌음을 보시고,

아라한과를 얻는 것에 대한 21가지 명상 주제를 담아

심오한 범문인 대념처경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황금으로 만든 화병을 얻어 거기에 여러 가지 꽃들을 담거나

황금으로 만든 상자를 얻어 칠보를 담는 것처럼,

세존께서는 꾸르 지방에 거주하는 사부대중을 얻어 이 심오한 법문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꾸르 지방에서 대념처경만 설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다른 경전도 이곳에서 설하셨습니다.


더욱이 그 지방 사부대중들에게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남의 일을 시중드는 하인들 또한 알아차림의 확립과 관계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을 긷는 것과 물레 젓는 것 등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어떤 아낙이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어떤 것을 마음에 숙고하면서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세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공부도 하지 않아요.” 라고 대답하면,

“아! 너무 안타깝게 살아가시는군요. 그렇게 사시면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아요!”

라고 그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살지 마세요.” 라고 다시 경책을 한 뒤에

어떤 것이든 알아차림의 확립을 익히도록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만일 누구든

“나는 이런 것을 마음에 숙고하면서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고 있지요.”

라고 대답하면,


“오! 좋은 일입니다. 참으로 장하십니다!” 라고 치사한 뒤에,

“정말 가치 있는 삶이로군요! 아주머니는 진정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아주머니 같은 분을 위해서 정등각자이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라고 칭송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깜마사담마라는 상업도시에 머무셨습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상업도시 깜마사담마라고 하는 곳은 ‘얼룩진 발’이라는 의미의 지역입니다.


다음에 “그 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라고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네! 세존이시여.’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승려들을 항상 ‘비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비구들이여!’ 라고 말씀하셨으니

승려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욱이 빨리어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는 그 누구라도

‘비구’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라고 말씀하셨을 때, 승려 및 여자 출가자,

그리고 남녀 재가자도 그렇게 부르신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잠시 ‘비구’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비구를 빨리어로 ‘삑구’ 라고 합니다.

빨리어 ‘삑구’는 걸식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서 수행이나 종교생활에만 전념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걸사’라고도 하였고 그대로 음역을 해서 ‘비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상좌부의 비구의 경우는

227가지로 이루어진 구족계를 받은 사람을 비구라고 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가니까야 주석서에서는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 한다.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진다.’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상가가 성립되기 전에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비구여!’ 라고 말할 때는,

비구계를 받은 사람을 말하지 않고 비구계를 받은 사람과 함께 다른 출가 사문들을

모두 비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다시 부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중생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다.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라는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어로 ‘유일한 길’ 이라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빨리어로 ‘에까야나’를 말할 때

‘에까’는 하나이고 ‘아야나’는 길을 뜻합니다.

그래서 ‘에까야나’는 하나의 길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의 길이라는, 유일한 길이라는 ‘에까야나’라는 말은

다섯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샛길이 없는 단 하나의 길’ 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샛길이 없기 때문에 수행자는 확신을 가지고

처음부터 해탈할 때 까지 이 길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길은 없고 오직 이 길로 와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이 길은 혼자서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수행자는 동반자 없이 혼자서 여행을 합니다.

단체에서 수행을 하거나 집중수행을 할 때에도 사실 수행자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혼자입니다. 누구도 수행자와 같이 가지 않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집중이나 지혜를 수행해 줄 수 없고

수행자도 자신의 집중이나 지혜를 그 어느 것도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집단 속에서 수행을 할지라도 실제로는 혼자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길은 유일한 길, 또는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홀로 가는 저 젊고 아름다운 수행자여!”

여기서 홀로라는 것이 바로 혼자서 걸어가는 길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혼자 태어나서 혼자 살다가 혼자 죽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과 더불어 수행을 하지만 사실은 각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이 길은 한 분이 간 길’ 이라는 것입니다.

‘한 분의 길’ 이라는 것은

‘탁월한 분의 길로써 부처님이 알아내셔서 가신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분의 길’ 이란 오직

‘스스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세존께서 가신 유일한 길’ 이라는 의미입니다.


네 번째 해석은 ‘이 길은 오직 이 법의 제체에만 존재한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에까’는 하나를 뜻하고 ‘아야나’는 존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에까야나’는 오직 이것 하나에만 존재함을 뜻합니다.

오직 이 법의 체제에서만이,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만이

알아차림의 확립,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팔정도에 대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법구경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길에 대하여 더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쎄와 막꼬 나탄요’ 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유일한 길이고 다른 길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고 다른 길이 없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다른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의 확립은 열반에 이르는,

고통을 해결하고, 마음 속 번뇌를 소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까야노 막꼬’ 라고 하는 이 말씀은

유일한 길, 단 하나의 길, 혼자서만 걸어가야 하는 길, 한 분의 길,

오직 이 길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길을 통해서만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배우시는 대념처경은 단 하나의 유일한 길입니다.

모두 단 하나의 유일한 길로 오셔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10.15 13:54:20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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