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문토굴을 박차고 **
효봉스님이 사생결단의 각오로 금강산 법기암 뒤에 무문(無門)토굴을 짓고 무자 화두를 든 채 용맹정진에 들어간 지 꼬박 1년하고도 6개월이 흘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바뀌고, 단기 4264년(서기 1931년) 초가을
어느 비 개인 날 아침. 청명한 가을 햇살을 받은 나뭇잎들이 싱그러운 내음을 풍기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난 밤 하늘이라도 무너져 내릴듯이 으르렁대던 천둥소리도 말끔히 걷힌 날 아침, 토굴에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효봉스님은 홀연히 발로 벽을 박차고 토굴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드디어 무자 화두를 깨치고 한소식을 얻은 것이다.
과거와 현재, 또 미래의 무수히 많은 수행자들이 오로지 이 한 소식을 얻기 위해서 뼈를 깍고 피를 말리는 정진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리한 장마가 걷히고 간밤의 천둥소리가 멎은 뒤 밝은 햇살이 온 우주를 비추듯 뼈를 깍고 피를 말리는 정진 끝에는 반드시 한 소식을 터득하는 법.
-무자화두 깨치고 오도송(悟道頌) 노래-
이 소식은 지혜의 눈이요 마음의 눈이다. 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밥도둑을 면하지 못한다고 일찍이 선사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이 진짜 소식을 깨달아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하니 누군들 이 소식 얻기를 원치 않으랴. 그러나 사생결단의 정진이 없으면 얻지 못하니 이 또한 아무나 얻지 못하는 까닭이다.
효봉스님은 토굴을 발로 박차 무너뜨리고 나왔으나 너무 오랜 기간동안 운동을 하지 못한 탓인지 두 발로 일어서서 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정진(默言精進). 자리에 눕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고 하루 한끼 식사로 지탱해 왔으니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든것은 당연하다.
햇볕을 보지 못해서 얼굴은 마치 겨우내 방안에서 자란 무순처럼 창백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자랄대로 자라 덥수룩했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섬광(閃光)처럼 빛났다. 이제 막 출세간에 갓 태어난 그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이 흘러나왔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을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海低燕巢鹿抱卵 水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이 오도송을 들은 석두화상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사좌전송(師佐傳頌)을 내렸다.
봄이오니 온갖 꽃 누굴위해 피는고 동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가는 이익 보지 못하네 흰머리의 아들이 검은 머리 아버지에게 나아가니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다 바다에 들어가도다.
春至百花爲誰開 東行不見西行利
白頭子就黑頭父 兩個泥牛戰入海
이와같이 도를 깨친 스님들이 그 깨달음의 세계를 시로 읊게 되는데 이런 시를 오도송, 또는 게송(偈頌)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선시(禪詩)로 불리기도 한다.
선시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Gata로부터 나왔다. 중국에서 이 Gata라는 말을 번역하면서 가타(伽陀), 게타(偈陀)라고 음역(音譯)하였다. 인도에서의 Gaya는 불전(佛典)의 운문체로서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거나 산문을 마무리하는 운문의 형식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에서 시경육의(詩經六義) 가운데 송(頌)에 해당하는 것이다. 시경육의에서 송은 종묘제례를 위한 가사체의 시문체, 제왕의 성덕을 찬송하는 시문 등을 일컫는다.
뒷날 선승들이 지은 운문을 총칭하여 시게(詩偈), 혹은 송(頌)이라 하였으며, 특히 첫 깨달음을 얻은 후에 얻은 시를 오도송이라 불렀다.
이 게송도 역시 엄격한 한시의 율격을 밟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엄격한 차이가 있는데 게송은 문자를 빌었으되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문자 밖의 현리(玄理)를 읊고 있는 것이다.
문자 밖의 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참선에서 말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종지(宗旨)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시는 그 격조와 함축이 독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종용록(從容綠)』에서 만송노인(萬松老人)은 이렇게 말했다.
한 자 한 획이 모두 마음길 끊어진 곳에서 나왔다.
片言隻字皆流出佛祖之淵源
선의 시발이 불립문자에서 나왔으므로 문자를 빌어서 깨달음의 세계를 읊는다는 자체가 모순이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그 마음의 경지를 다른 이에게 전하는 방법은 산문으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짧은 시의 형태를 취하는 편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시는 상징과 은유 등의 수법을 빌려서 표현하므로 깨달음의 경계를 마음에서 전하고 받는 데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효봉스님과 석두화상이 주고받은 선시의 경지는 깨닫지 못한 범상한 속인들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는 그야말로 진흙밭의 소처럼 어떤 대상과의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마침내 한데 어우러져서 법열의 세계인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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