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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liang    
무량 (mooliang)
세상이 너무 오염되어 있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 오염되어 있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더 오염돼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살자고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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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중흥을 위하여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마르틴 루터 같은 지도자를 기다린다..

 

지난 10 31일 열차에서 우연히 독일에서 온 한 노인을 만났다. 서울에 사는 아들을 보기 위해 매년 한두 번씩 온다고 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으니 돋보기도 안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눈이 좋으신 모양이라고 했다. 사실은 눈이 좋은 것이 아니고 근시라서 먼 곳은 잘 못 보지만 책은 들여다 보아서 그렇지 읽을 수 있어서 늙어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다. 그 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이 이야기 세계 종교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마침 읽고 있던 부분이 개신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고 보니 오늘이 개신교 탄생 500주년 기념일이네요했더니 그 노인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걸 아셨소?’ 하기에 지금 읽고 있는 부분에 1517 10 31일 그러니까 바로 500년 전 오늘 마르틴 투타가 로마 교황청의 비리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 궁전교회 정문에 써서 못을 박은 날이라고 쓰여 있어요.’ 하면서 독일에서는 대대적인 행사를 한다고 인터넷에서 보았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면서 아울러 인쇄술을 개발한 쿠덴베르크의 축제도 열리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에는 개신교가 성하지만 루터 기념 이야기는 없다고 하기에 한국의 개신교는 장로교가 80%이고 루터교는 교회가 몽땅 49개뿐이라서 그럴 거라고 했다. 노인은 솔직하게 자기는 독일에 살지만 루터의 자세한 업적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책에서 본 이야기를 했다.

모든 일이 성사되려면 삼합이 맞아야 된다고 했는데 루터 이전에도 위클리츠나 후쓰 같은 개혁자가 나왔지만 개혁의 토대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실현은커녕 오히려 역공을 당하여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카톨릭교회의 비리에 대하여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 마침 쿠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개발되는 바람에15일 만에 독일 전역에 95개조의 반박문이 전파되었고, 1517- 1520년 사이에 루터의 저서 30종이 30만 권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 물론 로마 교황청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21년에 파문칙서를 내리고 독일 황제는 모룹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를 공권상실자로 규정하고 그의 저서를 열람 금지시켰다. 루터의 신변의 위험을 잘 아는 작센 주의 센제후 프레드릭이 바르트부르크 성에 루터를 숨겨주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될 수 있었다.

루터는 당시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면 사형까지 처하는 일이 벌어지던 때였는데 9개월 동안 성에 숨어 있으면서 라틴어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을 했는데 지금 독일어의 표준어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은 다른 종교와 달리 결혼을 하고 있는데 성직자의 결혼제도를 마련한 것도 루터였다고 한다. 루터는 사제의 신분으로서 수녀원을 탈출한 16세 아래인 카테리나 폰 보라와 결혼을 하고 자녀를 6명이나 둔다. 남녀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불교 신자가 왜 이렇게 너절하게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흔히 말하는 종교개혁의 효시가 된 날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얼마 전에 어느 통계를 보니까 개신교는 신자가 늘고 있는데 불교는 300만이 줄었다고 나와 있었다. 100여 년 전만 하여도 유일신이 있어야 종교라고 하던 서양 철학이 불교와 유교를 훌륭한 종교로 인정하고 유일하게 기독교가 국교였던 나라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1600년이 넘고, 이씨 조선 500년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줄지 않던 불교신자가 줄었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불교 중흥의 길을 터보자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루터는 당시 로마 카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자국 언어로 번역을 하면 사형에 처하는 엄벌을 내리던 시절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위대한 업적이고 그 번역이 훌륭해서 오늘날 독일어 표준어의 기본이 되었다니 그 또한 위대한 업적이다. 이렇게 생명을 내걸어야 하는 일도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어떤가 도리켜 보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억불정책을 쓰던 조정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자 그 보급을 위해서 유교의 기본인 사서삼경을 번역하지 않고,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인쇄하기 위한 간경도감을 두어 여러 불경을 간행하였는데, 정작 불교를 짊어지고 포교에 앞장서야 할 스님들은 우리 글이 만들어진 지 6백년이 다가오는 오늘날도 여전히 한자어로 된 불경을 무슨 장자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으니 한심스럽다.

동국 역경원에서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매진하여 많은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아직도 매일 독송하는 반야심경 하나도 우리말로 독송하는 절이 별로 없다. 특히 많은 신자와 절을 거느리고 있는 조계종이 특히 그러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반야심경을 외우지 못한다. 그런데 줄줄 외우는 젊은이에게 한자로 쓴 반야심경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니 한자를 안 배워서 못 읽는다고 했다. 이것이 반야심경인데 뜻은 아느냐고 했더니 뜻도 모른다고 했다. 뜻도 모르고 외우기만 하면 무엇 하느냐고 했더니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면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열심히 외웠단다.

중세의 로마 교황청이 부패하게 되는 근원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교황청이 추대하고 인정한 신부만이 라틴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일반 신자가 고해성사를 할 때 하느님에게 좋게 아뢰어 달라고 담임 신부한테 금품이 오갔는데 그게 발전하여 죄를 면해준다는 면죄부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요즘 우리 불교의 어느 종파는 마치 중세 로마 카톨릭처럼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법보신문 11 29알자 표제에 조계종 제35대 집행부 금권선거 근철 시험대 오른다.’로 크게 나와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금권선거를 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 교황청이 타락하던 14-5세기에는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돈만 내면 라틴어를 몰라도 사제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교황 레오10세는 돈 많은 피렌체의 귀족의 자제로서 13세에 추기경이 되었고 37세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열차에 타고 다니다 보면 기독교 신자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어 나는 무척 부럽게 느낀다.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것은 읽으면 그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불교계는 어떤가? 각 교파마다 소의 경전이 있는데 그 소의경전마저 1년이 가도 한 번 제대로 독송하지 않는 절도 많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파의 어느 절에서는 우리말로 번역된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한 달에 한 번 관음재일에만 독송하고 있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교파에서는 소의경전을 매일 독송하고 있는 교파도 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처럼 방대한 분량의 경은 하루에 수십 페이지씩 할당하여 독송하고 있는 교파도 있다. 물론 우리말도 번역된 불경이다.

미개한 시대에는 모르는 것이 약이었지만 문명한 오늘날은 모르는 것이 병이다. 알면 알수록 더 즐겁고 더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 호기심이라고 한다. 그 지적 호기심을 무시하면 그 사물과 멀어지게 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불교에 발을 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적 호기심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매일 독송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는 것과 관세음보살의 위대함을 찬양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는 똑 같은 독송이라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아직도 매일 사시불공에 빠뜨리지 않고 독송하는 내용들이 한자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저 따라오라고 한다면 중세의 로마 가톨릭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예불문 헌향진언에 이어지는 헌공예참에서 (중간생략)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서건동진(西乾東震) 급아해동(及我海東) 역대전등(歷代傳燈) 제대조사(諸大祖師) 천하종사(天下宗師) 일체미진수(一切微塵數) 제대선지식(諸大善知識) (). 아마 많이 듣고 독송하여 익히 외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쳤지만 이 글에서 서건동진(西乾東震)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짐작으로 서건은 인도, 동진은 중국 해동은 한국 정도이다. 조계종에서 펴낸 통일법요집에는 이 부문을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헤명을 이어서 이 세상에 마음 등불 훤히 밝히신 모든 선지식꼐 귀의합니다. 원문과 전혀 다르게 번역을 해놓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도 정성을 엿볼 수 있는 변역도 없지 않아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지심귀명례, 인도에서 한국까지 깨친 진리 전법하신 선지식과 모든 조사 바른 스승 도인들깨 정성 다해 진심으로 공양합니다.’ 특히 이 번역은 정성 다해 진심으로 공양합니다. 를 강조하여 앞에 본래의 지심귀명례를 인용했다는 점이 멋스럽게 느껴진다.

요즘 연말이 가까워지면 절마다 관세음보살 100일 기도를 드리는데 관세음보살42수 진언을 독송하는데 흔히 1 여의주수(如意珠手) 진언 옴 바아리 바다리 훔 바탁 이렇게 독송하는 것을 쉽게 고쳐서 지심귀명례 보배 제물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관세음보살 여의주수 진언을 외어야 하느니라 옴 바아리 바다리 훔 바탁 (3번 절) 이 두 가기 예에서 어느 쪽을 당신은 택하겠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거의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뒤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예문에서 보듯 우리 불교계는 너무나 안일하게 처해왔기 때문에 신자가 줄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돌아오는 해 불기 2562년은 불교 개혁의 해로 정하고 모든 경전은 물론 일상의 예불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해로 정할 것을 제한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한자어로 익혀온 스님들이 우리말로 바꾸는 것은 번거롭고 도리어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하지만 세상이 바뀌면 종교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고 실천에 옮길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에 있어서 어느 권위를 가지고 정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도올 선생이 잘 인용하였지만 중국의 사서삼경을 가장 잘 해석한 책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있는 사서삼경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번역한 것을 다시 고치고 고쳐서 오류가 없고 매끄럽게 번역을 하면 학위를 주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남이 번역한 것이라도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서슴없이 그것을 활용하는 아량도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량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즐겨 쓰시던 방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교 중흥을 위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디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2017.12.03 23:37:52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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