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사 차맷돌
강화 선원사 유물전시관에 소장하고 있는 고려 차맷돌은 선원사 주지 성원(誠願) 스님이 절 동쪽 신동산(神童山) 기슭 도감마을 지하 5미터에서 파냈다. 성원 스님은 신돈이 죽자 모든 유물들을 우물터에 빠뜨려 버렸다는 마을 촌로의 구전을 토대로 "이 차맷돌이 변조(신돈의 법명) 스님이 쓰던 맷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윗부분만 발견된 맷돌의 몸통에는 모란꽃이 양각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맷돌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원사지는 팔만대장경의 판각 성지로만 알려져 오다가 1994년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차맷돌과 청자 찻잔 등이 발견됨으로써 선차문화(禪茶文化)의 현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선원사에서는 진명 국사(眞明國師), 원오 국사(圓悟國師), 원감 국사(圓鑑國師), 혜감 국사(慧鑑國師)와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 등과 최씨 무신 정권기 최고의 실력자 최우와 신돈 등에 의해 선차문화가 꽃폈다. 하지만 선원사지 폐사 이후 역사와 단절되어 선차맥은 이어지지 못했다. 차를 선의 경지로 끌어올린 고승은 단연 조주 종심(趙州ㆍ778~897) 선사다. 그의 끽다거 공안은 1천년 전 당나라에서 불기 시작해 태고 보우, 진각 국사 혜심, 원감 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 등에 의해 이 땅으로 선차 문화가 들어왔다.
선원사지의 선차는 보조 지눌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송광사 6세 법손 원감 국사 충지에 의해 급격히 발전되기 시작했다. 보조 국사는 굴산문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굴산산문에 속했다. 보조의 차맥은 마조 도일 - 염관 제안 선사 - 범일 국사 등에 의해 찬란한 여명을 밝혔고 진각 국사 혜심과 원감 국사 등에 의해 꽃을 피웠다. 차맷돌을 역사에서 문헌으로 증거한 이는 이규보이다. 이규보는 ‘차는 곧 선의 시작이다’고 말할 정도로 차와 선은 곧 한길이라고 여겼으며 차맷돌을 선물받고 시를 남겼다.
“돌을 쪼아 만든 바퀴 같은 맷돌 / 빙빙 돌림에 한팔이 수고스럽다만 / 그대 어찌 차마시지 않으리오. / 나의 초당에 보내주었느뇨 / 내 심히 잠 즐기는 줄 알아서 / 이것을 나에게 보내준 것이리 / 푸르고 향기로운 가루 갈아내니 / 그대의 뜻 더욱 고마워라.” 이규보가 누구에게 선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때 차인들의 필수품이 차맷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도감마을에서 발견된 상부만 있었으나 이어 선원사 터에서 하부가 발견되었다. 상부 가운데 구멍으로 마른 찻잎을 넣어 갈아냈다고 하며 상돌에 나무로 만든 회전용 손잡이가 부착되어 사용되었던 흔적이 있다. 또한 아름다운 차꽃잎 문양이 선명히 양각되어 있다. 국내 희귀 유물로서 매우 귀중한 고려시대 유물이다.
차맷돌(茶磨) 강화 선원사 유물전시관 소장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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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생활문화대전, 정동효, 윤백현, 이영희, 2012.7.10, 홍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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