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러 가지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욕망이나 분노, 어리석음, 질투, 아만 등 인간의 무지는 숙명적으로 삶을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방편이다. 탄생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탐(貪) 진(瞋) 치(癡) 삼독심으로 오염되고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본래의 맑고 밝은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일이다.
부귀와 명예,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끝없는 욕망,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일어 나는 만이나 화.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고 무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간은 이러한 삼독심(三毒心)을 바탕으로 수많은 경험, 기억, 생각, 관념, 가치관 등의 쓰레기를 몸과 마음에 쌓아온다. 그 결과 인간의 심신은 어느덧 답답하게 막 히거나 탁한 흙탕물 같은 상태가 되어간다.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비워내고, 닦아주고, 보듬어 줌으로써 ‘나라고 하는 존재’의 본래 모습을 되찾고자하는 일,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이다.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수행은 그것에 대한 깊은 탐구이면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 어떤 대상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운 부처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의 궁극인 깨달음과 우리가 일상에서 찾고자 하는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는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라는 뿌리에서 자란 가지들이다. 바로 그 대자유가 부처이고 해탈이며 큰 깨달음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대자유인이었다. 본래 부처라고 한다. 그런데 우주와 인생에 깃들어 있는 궁극적인 이치를 밝게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급급하고 얽매여서 온갖 업을 지으며 헛되이 윤회를 한다. 이것이 무명(無明)이다. 진리에 대해 무지한 상태라는 뜻이다.
인간이 무명에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나’라는 아상과 그로 인한 번뇌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라는 생각은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 되어서 삶 전반에 따라다닌다. 말 못하는 갓난아이도 ‘나’의 엄마를 찾는다. 그 아이는 차츰 성장하면서 나의 가족, 나의 성격, 나의 자존심, 나의 재산을 끌어안게 된다. 이른바 아상(我相)이 생기는 것이다. 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만 명이 모두 다른 아상을 가지고 산다. 부모가 다르고 형제가 다르며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상은 곧 수많은 번뇌를 만들어낸다. 번뇌 중에서 가장 뿌리 깊은 것이 탐진치 삼독심이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지 못하게 하는 대표적인 독약과 같은 것들이다.
수행은 바로 이러한 아상과 번뇌를 소멸해가는 몸과 마음의 작업이기도 하다. 생각을 소멸하고 견해를 소멸하고 의도를 소멸하고 욕심을 소멸하고 감정을 소멸하는 일이다. 수많은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여기에 본래 있었던 부처와 평화, 자비, 행복을 찾아가는 일이다. 원래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인 것이다.
내안에 본래 있었던 평화와 자비, 행복을 찾아가는 수행자의 몸과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유연성과 면역력이 생성된다고 한다. 이는 몸과 마음의 찌꺼기들이 떨어져나감으로써 생기는 필연적 현상이다. 만성 통증, 두통, 신경증, 우울증, 고혈압, 심장병 등의 완화나 치료효과는 수행의 응답이기도 하다. 드문 경우지만, 수행을 했다하여 수행 경력을 훈장처럼 뻐기는 경우가 있다.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에 그칠지라도 그것은 ‘나’라는 상이 분명한 수행병 증세이다. 이 병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약이나 가르침으로도 치유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시도 쉼 없이 자신이 몸과 마음을 살펴서 ‘나’라는 마구니의 꼬임에 빠지지 않을 일이다.
불보는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감성적인 경험을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영적인 수행을 계속하면 생각은 더욱 안정되고 맑아져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과 생각이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균형이 잡히면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좀더 분명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느낄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고 개가 짖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아름답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운문(雲門)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화장실에서 나오던 운문 스님이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스님의 눈은 똥을 치울 때 쓰는 긴 나무막대기와 마주쳤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진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바로 순간 순간의 삶, 이것이 불보이다. 불보에서 얘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바깥의 모양이나 형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제자 한 사람이 아주 수준 높은 박물관 회화전에 나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전시회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유난히 화제가 되는 예술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날 전시회에 구경왔던 많은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환성을 내지르며 떠날 줄을 몰랐고, 다들 멋있고 아름답다고 이구동성이었다. 박물관 측에서도 그 작품을 걸어놓기 위해 큰돈을 지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멀리서 그것을 보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표현해 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 작품은 액자 안에 낡고 헤진 양말 한 켤레를 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뭐야. 도대체 이 헌 양말 한 켤레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뜻 보면 하찮게 보일 수도 있으련만, 사람들은 왜 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잠시 후 나는 왜 사람들이 그 작품에서 그토록 큰 감명을 받는지 깨달았다. 다름아니라 그 양말 속에는 한 인간의 고단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양말의 주인은 저렇게 양말이 해어지고 닳도록 걸어다녔을 것이다.
한 인간의 수많은 고통의 흔적들이 헤진 양말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고, 이 양말 작품은 바로 그 점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품에는 우리가 소홀히 하는 우리네 일상의 삶이 그대로 있었다. 액자에 걸린 양말 자체는 낡고 더러웠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아주 아름다웠던 것이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이다.”
운문선사는 바로 이 양말이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아름다움이 이처럼 겉모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 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本性)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이 나타난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나 있거나 슬프거나 기가 죽어 있으면 창밖에 새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 해도 단지 시끄러운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 혹은 외부의 조건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며,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추하게 보이며, 마음속이 분노로 가득하면 칭찬조차도 욕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침이 넘어가질 않는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삼매의 본래 의미이다. 앉아있든, 서있든, 누워있든, 운전을 하든, 누군가와 얘기를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 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런 때야말로 [일상에서의 모든 것이 진리] 이다.
온 우주가 이미 그 자체로 진리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다.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믿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 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이며, 이 세상이 이미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매우 위험한 세상이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수해뿐이 아니라 많은 재난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천상이나 극락이 아니라 사바세계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가끔 겪게 된다. 사바세계는 겨우 참고 견딜만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 한세상 살아가려면 참고 견딜만한 일이 끝없이 이어진다.
왜 요즘 이런 천재지변이 많은가. 이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지구에서 사는 각 개인이 재난을 불러 들이고 있다.
우리가 순간순간 어떻게 사느냐의 메아리다. 이런 피해에 과연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하는 것을 한번 다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그것은 올림픽 표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것을 강조하는 게 옳은 주장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근대 과학의 좌우명은 '스피드', 즉 속도다. 모든 면에서 일류를 지향하면서 나온 말이다.
뜻을 일등에 두고 일류로 갖는 것은 좋지만 실제 살면서 일등이란 외롭고 고독하다.
일류를 지향하다보니 도착만을 위해서 과정을 소홀히 한다. 목적만을 위해서 수단을 소홀히 한다 삶은 미래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그런데 흔히 생각은 과거에 있고 또 오지도 않은 미래 쪽으로 간다. 늘 지금 이 자리를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고, 꽃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사계절의 순환이 받쳐줘야 된다. 잘 살 줄 아는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기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이게 우리 스님들이 살던 삶의 모습이다. 문명은 직선이다. 직선은 비장하다.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의 묘미를 알아야 한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불구불 돌아가면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지니면서 참고 견디면서 살아간다. 곡선은 그런 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성급하게 움켜쥐려 해선 않된다.
지금 지구 환경은 말할 수 없이 매우 불안하다. 현재 지구 환경 위기가 9시 15분이고 12시가 종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구 종말이 지구환경시계로 따지면 2시간 45분남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생활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갈수록 심할 것이다. 소위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하고 있는 미국 같은 산업 구조를 가진 나라들이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는 아황산가스 배출량이 미국이 전 세계 28%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홍수라든가 가뭄이 미국 탓이라고 한다. 세계 인구의 5%밖에 안 되는 나라가 거의 전 세계 자원을 독점하다시피 해서 마음대로 쓰고 휘두르지 있다. 잘 산다고 할 때 미국식으로 사는 것을 아주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업이 된다. 개인의 업을 별업이라 하고, 여럿이 짓는 업을 사회적으로 짓는 업을 공업이라고 한다. 대기오염과 같은 것은 별업이 아니라 공업이다. 모두가 그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업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 밭에 뿌린 씨와 같다.
이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일찍이 예상 못했던 결과를 만든다. 이것이 업의 파장이고 흐름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자각을 하면서 산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인류가 살아 남으려면 현재로 봐서는 반 자연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자연의 순리에 다른 친자연적인 또는 생명의 원리를 받아 들일 수 있고, 공존공생해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에서 한해에 1만2천명의 어린이들이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주로 미혼모, 이혼가정에서 오는 현상이다. 말못할 사정이 어디 있나? 그것은 순 구실이다. 자기 자신밖에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족끼리의 동반자살, 이것도 말이 안된다.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말못할 사정이라고 하지만 참고 기르면서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되고 사람이 되고 인간이 형성되어 간다.
이제는 우리들이 나서서 이웃을 도울 때이다. 그게 사는 일이다. 부모의 은혜, 친구의 은혜, 스승의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와야 된다.
남을 도와서 그 사람의 삶이 그만큼 나아지는 거라면 내 삶의 질도 그 만큼 좋아진다. 타인의 삶에 바르게 영향을 미친 행동은 우리 자신의 삶에 그만큼 의미를 가져다 준다. 의미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뜻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자기만 아는 삶. 그것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 사람을 분열시키는 것은 신앙을 갖는 사람,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 여기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그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고 받아 들이는 사람 사이에 있다. 눈앞의 이해타산을 생각하지 말고 전 인생의 과정에서 길게 봐야 한다.
그것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로도 비교할 수 없다. 요즘 늦게 발심해서 될 수 있으면 내 몸이 고달프더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한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거들어줘야 된다.
부처님께서 일생동안 설하신 경전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을 총별(總別)로 나누면 화엄경은 총경(總經)이고, 그 이외의 경은 별경(別徑)에 속한다.
화엄경은 별경의 내용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화엄경만 알면 다른 경전은 다 아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화엄경의 초점을 알면 바로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알게 되는 것이고,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하신 내용의 초점을 알게 된다.
화엄경의 초점은 바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는 네 가지다. 믿고, 알고, 행하고, 증득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을 이루는 네 기둥이요, 그것은 곧 불법의 기둥이 되기도 합니다.
화엄경은 이처럼 신해행증이 주가 되기 때문에 제목부터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의 믿을 신(信),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의 해(解),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의 행(行), 의인증입성덕분(依人證入成德分)의 증(證)이라는 네 가지다.
그렇다면 화엄경에서 믿음을 어떻게 설해놓고 있는지를 살펴 보면, 믿음은 흙과 같다고 했다. 화엄경에는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믿음이 도의 근원이며,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다.
또한 일체 모든 선근은 믿음으로부터 성장하며, 열반 무상의 길도 믿음으로부터 개척되고 열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그것은 바로 흙과 같이 만물의 근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처럼 믿음은 모든 만물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땅덩어리다.
그 다음으로 화엄경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농사를 짓는다면 농사짓는 법을 알아야 하고, 밥을 한다면 밥짓는 방법을 알아야 하듯이 일체 모든 법칙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믿고 바르게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 있고 아무리 훌륭한 농업기술을 알았다 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불법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행을 안 하면 헛일이다.
그런데 요즈음 불자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실행의 측면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믿는다는 차원에서 이 절, 저 절 다니고 알아야겠다고 불교대학을 열성으로 다니기는 하지만 믿고 아는 만큼 실행하는 것에서는 뒤떨어진다.
배우려고 열성을 다하는 것만큼 실행을 해야 한다. 신(信), 해(解), 행(行) 세 가지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머리카락 하나만큼이라도 더 비중을 둔다면 그게 바로 행(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하면 되겠습니까? 화엄경에는 그 실행방법으로 열 가지 바라밀을 제시하고 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를 더해 열 가지 바라밀을 실천과 수행의 방법으로 설해놓고 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알았으면 이 열 가지를 행해야 한다.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외우더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 화엄경에 설해 놓은 열 가지 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을 꿰뚫는 방법이다.
화엄경은 십바라밀의 실천과 관련 단계적으로 50 단계를 설해놓고 있다. 비유하자면 50층 불법이라는 고층 건물을 짓는데 50계단을 하나 하나 세밀하게 설해놓은 것이다.
십바라밀을 실천함에 있어 열 가지 바라밀을 믿는 십신(十信)의 단계가 있고, 믿는다는 바탕 위에 그 열 가지 바라밀에 머무는 십주(十住)의 단계가 있으며, 머무는 것으로 본궤도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행하는 십행(十行)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십회향(十廻向)이 있다.
회향이라고 하면 어떤 일을 마칠 때 쓰는 말이라고 알고 있는 불자들이 많지만 회향은 무엇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더 크게 보다 진취적으로 돌려 나가겠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원을 세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십회향 다음에는 십지(十地)가 있습니다.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를 합한 50가지에 등각, 묘각, 구경각을 보태면 53가지가 된다. 53선지식은 사람을 상징으로 나타내면서 동시에 53가지의 계단을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보시, 지계, 정진 등을 실천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을 원력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의 48원, 석가모니불의 10대 발원 등 스스로 원을 세우고 그것으로 실천의 힘을 길러야 한다. 실천의 힘이 바로 역(力)이다.
다른 이가 강물을 건너지 못해 허우적거릴 때, 그 사람을 업고 건널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내 힘이 부족하면 함께 강물에 빠져 버리게 되므로 스스로 힘을 길러 두루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지(智)는 지혜로움을 다시 한번 강조해 놓은 것이다. 모든 것을 실천하는 원동력은 지혜다.
이렇게 화엄경에 설해놓은 실행방법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증(證)의 경지가 온다. 증은 곡식의 열매를 따는 것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서 공부를 해서 깨쳐야겠다 하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설사 공부를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한다 하더라도 열 가지 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각에 불과하고 개인주의에 불과하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독각불이다.
즉, 이기적인 깨우침에 치우치면 독각이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강하면 보살이요, 그 자리이타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면 바로 부처가 된다. 불법은 자기도 깨우쳐야 되지만 중생을 이롭게 하고 제도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본래면목이 부처라는 말이 있다. 본래면목을 두고 어떤 스님들은 심즉시불(心卽是不)이라고 한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인데 또 어떤 스님은 비심비불(非心秘佛) 즉,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하는 분도 있다.
또 다른 스님은 무심무불(無心無佛) 즉, ‘마음도 부처도 없다’ 고 한다. 그럼 어떤 스님의 말이 맞고 어디에 맞춰야 할까? 모두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이 세 말은 모두 하나로 돌아가고 있다. ‘심즉시불’은 석가모니불을 나타낸다.
‘비심비불’은 노사나불에 해당되고 ‘무심무불’은 비로자나불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물질의 세계에 해당되는 석가모니불의 차원에서 보면 처처가 부처다. 상대성이 있는 세계 즉, 공기의 세계인 노사나불의 차원에서 보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절대성 즉, 진공의 상태인 비로자나불의 경지에서 보면 중생도 부처도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따로 있지 않다. 물질에 진공이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밥 먹고 똥 누는 게 깨달음이다. 깨달음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깨달음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 깨닫기에 가까워진 것이다. 내가 없으며 생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
한 생각 일어나면 모두 망념이라 했는데, 몸이 어디에 있고, 그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내가 깨달았다’라는 생각이 어디에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을 쥐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망념이다.
긍정이 있으면 벌써 부정이 따라 온다. 없다고 하면 벌써 꽉 들어찬 것이고, 마음 비웠다 하는 순간 비웠다는 생각이 들어차게 된다. 그러니 비웠다는 생각 자체도 없어야 진정하게 비우게 된다.
아니다. 아니다. / 아닌 것도 아니다. 비워라. 비워라. / 비운 것도 비워라. 없애라. 없애라./ 없는 것도 없애라.
바로 이것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설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긍정과 부정, 있음과 없음을 뛰어 넘은 불법의 가르침은 절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두루 통하는 것이 불법이다.
불법을 믿고 알아 배웠으면 일상생활에서 빈틈 없이 써먹을 수 있는 진정한 불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