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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의 불교적 이해

불성의 불교적 이해

 

수행을 통해 불성을 깨쳐 성불한다. 불성은 모든 유정물이, 또 나아가 모든 무정물이 가지고 있다는 신비한 속성이다. 불성은 연기(緣起)하여 무상한 삼라만상 가운데서 변치 않고 모든 사물에 두루 존재한다. 대승 일부에서 사물의 존재양상인 공()함을 실체화하는 오류를 통해 불변인 진공(眞空)의 묘유(妙有)를 주장했듯이, 불성 또한 불변하는 실재(實在)로 여겨졌다.

 

빛으로 충만하고 무한한 지혜의 근원이면서 깨달음을 성취시킨다는 불변불멸의 불성이 힌두교와 그 전신인 바라문교의 아뜨만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불성과 아뜨만은, 비록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깨치게 되면 해탈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속성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는 불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붓다의 무아와 무상 그리고 초기대승의 공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이미 익숙하다.

 

나는 이러한 불성의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좀 다른 각도에서 보이려 한다. 밑의 논증은 내가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제시하는 논증과 동일한 구조를 가졌는데, 불성과 아뜨만이 다르지 않다면 같은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겠다.

 

1. 불성은 어떤 속성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속성을 가지면 불성은 속성과의 복합체(composite)가 되는데, 불교는 복합체의 실재(實在)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합체라면 원칙적으로 분해되고 변화하여 파괴될 수 있기 때문에, 불변불멸하다는 불성이 복합체일 수는 없다. 불성은 단순체(simple)여야 한다.

 

2. 단순체는 부피(volume)를 가질 수 없다. 부피가 있다면 그 부피를 이루는 더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복합체가 되기 때문이다. 부피가 없는 것은 물리적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불성이 우리 몸이나 자연세계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가 있는데, 아무도 답변할 수 없다. 그리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불성이 과연 어떤 인과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도 설명할 수 없다.

 

3. 항상(恒常)하다고 여겨지는 불성은 만물이 찰나마다 생멸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불성도 찰나생찰나멸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성은 시간선상에서 여러 시간대에 걸쳐 존재하는 불성의 복합체, 예를 들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불성의 복합체로 간주되어야 할 텐데, 불교는 복합체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성을 개념적으로 분석해 보았을 때 위에서 지적한 문제에 직면하는데, 선문에서 깨침의 과정도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부딪힌다.

 

1. 모든 수행자가 동일한 불성을 깨쳐 성불한다면, 이들이 깨치는 공통의 불성이 존재한다는 셈이다. 이것은 모든 사물이 자성(自性)이 없어 공하다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2. 깨쳐서 성불하는 무엇이 수행자마다 다르다면, 이 다른 것들을 모두 동일한(?) 불성으로 보게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있다. 그런 기준이 제시된 적이 없다. 한편, 그런 본질을 가진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의 존재가 공에 어긋난다.

불성에 대한 종래의 이해로는 철학적 난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심리형이상학에서 제시된 기능주의(functionalism)를 유명론적(唯名論的)으로 해석하면 모든 문제를 극복한 불성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책상이 있다. 나무, 플라스틱, 헝겊, 철제, 유리, , , 도자기, 심지어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책상도 있다. 모양도 둥근 것, 네모난 것, 세모, 타원, 긴 것, 다리가 네 개인 것, 세 개인 것, 하나의 몸통으로만 된 것 등 무한히 다르다. 우리가 책상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치 어떤 추상적인 책상이 어디엔가 존재하듯 착각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은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개별 책상밖에 없다.

 

개별 책상 모두를 책상으로 만들어 준다는 플라톤류의 책상의 형상(形相)같은 것은 없다. 디나가와 다르마키르티와 같은 불교인식론자들은 논증을 통해 이런 형상(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불교는 그런 보편자가 실제로는 우리가 사물과 그것의 기능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편리한 이름일 뿐이라는 유명론을 받아들인다. ‘()을 버리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플라톤류의 형상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책상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물체에서 물리적 공통점, 즉 물리적 본질 또는 자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런 것을 모두 책상으로 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심리형이상학과 다르마키르티는 책을 읽고 글을 쓰려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책상의 기능(function)이 있고, 그런 기능을 충족시키는 물체가 우리의 책상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런 기능을 책상의 자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책상의 기능이 자성이려면 그것은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내재적 본성(intrinsic nature)이어야 한다. 그러나 책상이라고 불리는 물체에는, 다른 모든 물체와 마찬가지로, 그런 자성이 없다. 그리고 책상의 기능 또한 구체적인 물체와 우리의 욕구가 환경과 더불어 연기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그런 기능이 수행되기 때문에 자성이 없어 공하다. 그래서 서양전통 유명론의 입장에서는 기능도 이름일 뿐이다고 말하게 된다.

 

나는 불성도 깨달음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어떤 구체적인 심신의 상태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각 수행자마다 깨달음을 위해 적절한 몸과 마음의 상태가 다를 것이다. 한 수행자의 심신도 매순간 달라지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상태가 달라진다. 그래도 순간마다 깨달음을 위해 가장 적절한 심신의 상태는 존재할 것이고, 수행자라면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매순간 최적인 심신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심신의 최적의 상태로 해석하는 불성은 수행자마다 또 순간마다 변화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유지되는 공통의 자성은 없다. 그래서 제법개공의 논제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상한 심신의 상태로서의 불성은 불변불멸의 단순체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본고의 앞부분에서 지적한 세 문제에 직면하지도 않는다. 불교에서 불성의 개념이 담당하는 긍정적인 역할이 크기 때문에, 나는 불성에 대한 새로운 불교적 해석을 통해 그 전통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출전 : 1610/ 202111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2021.12.02 08:05:24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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