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은 ‘저절로 열림’이끄는 수행 茶는 사람 사이의 벽 없애는 물건
무엇인가를 여는 것에는 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힘으로 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절로 열게 하는 것이다.
물론 힘으로 여는 데에도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니,
힘으로 밀어 여는 것과 흔들어 여는 것과 유혹하여 여는 것 등이 그런 것이라 하겠다.
이 모든 갈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결국 반발하는 힘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리의 바탕이며, 얼핏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거기에는
약간의 시간차와 시각차가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일반적인 방법이고, 파란고해를 낳는 주동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결국 보다 강고한 닫힘을 낳고, 이는 단절을 낳고,
단절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약육강식을 낳아 힘으로 돌고 도는 지옥을 만들어낸다.
참선은 이런 방식의 열림이 아니라 저절로 열림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을 저절로 열리게 하여 맑은 마음이 고요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를 삶의 참 주인으로 삼는 것이 참선이라 했을 것이다.
또 그러면서 말했을 것이다. “본래 닫혀 있는 것은 없노라”고.
허나 아무리 저절로 열리게 하는 방식이 곧 참선의 본질이라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도 방식이요 방편이다.
요컨대 참선의 세계에도 ‘함’이라는 힘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말씀이 그러하고, 조사의 화두가 그러하며,
여러 갈래의 수행방편이 또한 그러하다 하겠다.
그래서 이런 힘을 달리 불러 ‘법의 힘’이라 했다.
아무튼 본 모습을 다치지 않게 열어주어 그것이 잘 꽃피도록 하는 것이
참선의 열어줌이라면, 이와 비슷해 보이나 그와 다른 것 가운데 ‘취함’이 있다.
술을 마시고 취하거나 경치에 취하거나 글귀에 취하는 등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참선을 하는 이는 취해서는 안 된다 했다.
물론 말만 취함일 뿐 실제로는 그 어느 것보다 열어줌에 가까운 것이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의 관심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부처님의 경전에 취함이 열어줌일 수 있고, 조사의 화두에 빠짐이 열어줌일 수 있으며,
자아를 망각할 만큼 수행에 빠짐이 또한 열어줌일 수도 있다.
비록 일부의 옛 문인들이 이르기를
“차도 사람을 취하게 하니 왜 꼭 술인가”(茶亦醉人何須酒)라고 했다지만,
차도 그런 열어줌의 방편일 수 있다.
아니 차의 열어줌이 술의 열어줌과 다른 것임을 부드럽고도 은근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사실 술의 열어줌은 열어줌이 아니라 일종의 흔들림이다.
흔들고 또 흔들어 그 내용물이 밖으로 쏟아지게 만들어,
서로가 서로를 쏟아놓고 한바탕 요란을 떨다가 다시 주워 담아
돌아가는 것이 술취함이 아닌가?
허나 차는 그렇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나아가 ‘나’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줄이고 없애며 사라지게 하는 하나의 ‘열쇠화두’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옛 어른들이 차를 아껴온 까닭일 것이다.
그리하여 속말에도 이르기를 “술을 마시면 나라사람이 망하고 차를 마시면
나라사람이 흥한다”(飮酒亡國 飮茶興國) 라고 했던 것이다.
차라는 물건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열쇠화두’가 되는 것일까?
이 이야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허나 차의 화학적 성분을
거론하는 등의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담긴 옛 분들의 노래 몇 구절, 특히 그것을 따고 만들던
사람들의 땀이 베인 노래를 듣노라면 그 성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