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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p/ 오페라 대장경 원작자 조정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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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대장경 원작자 조정래를 만나다

조현 2011. 05. 18

  올해는 세계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 제작이 시작된 지 1천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경상남도가 주축이 돼 오는 9월23일부터 45일간 경남 합천군 해인사 일대에서 ‘2011 대장경천년 세계문화축전’이 열리는 등 다양한 ‘대장경’ 관련 행사가 펼쳐진다.

 다음달 3~4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선 경상남도음악협회가 주최·주관하는 <오페라 대장경>(총감독 김성중)이 무대에 오른다. 창원에서 이 오페라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아 서울에서 공연하도록 김두관 경남지사에게 편지를 쓴 이는 이 오페라의 원작소설인 <대장경>을 쓴 조정래(68)씨다. 조씨의 제안을 김 지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페라 대장경>은 이제 서울에 이어 영국, 독일, 미국 로스앤젤레스·뉴욕 등 해외 공연에 나서 인쇄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의 예술혼을 세계에 소개한다.

 1976년 처음 출간돼 지금까지 20여만권이 나간 <대장경>은 천년 동안 해인사 판경각에 잠자던 팔만대장경의 혼과 의미를 세상에 알린 주역이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으로 1300만부 돌파라는 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한 조정래씨의 첫 장편이 <대장경>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장경>은 한 출판사가 우리 민족문화유산을 소설화해 널리 알리기 위한 시리즈물로 펴낸 10여권의 ‘민족문학대계’ 중 한 권이었다. 당시 그 시리즈물의 장편은 등단한 지 10년 이상 된 중견작가들만 쓸 수 있었고, 신인작가들은 단·중편만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인인 그가 장편인 <대장경>을 쓰겠다고 나서자 선배들도 ‘<대장경>은 조정래가 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겐 불교 승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의 부친은 전남 순천 선암사 승려로서, 만해 한용운 등과 비밀독립운동 조직인 ‘만당’의 재무위원으로 활약했던 항일 승려였다. 만해가 추천한 시조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부친 조종현 스님에 의해 시조시인으로 등단한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이사장 오현 스님은 강릉 의상대에 조종현 스님의 ‘일출’이란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조종현 스님은 선암사에서 나와 교직에 종사하다가 정년퇴직 뒤 다시 승려교육에 나섰다가 총화종과 법화종의 종정까지 지냈다. 조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온 승려 ‘범일’의 모델이 바로 부친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풍경 소리와 독경 소리를 듣고 자랐던 조씨의 <대장경>엔 이땅에 면면히 내려온 불교적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설 <대장경>은 대장경을 봉안할 판경각을 온 혼을 불살라 지은 대목수 근필이 팔만대장경 조성을 이끈 수기 대사의 품에 안겨 죽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취재 이후 자리에 앉은 지 28일 만에 장편을 탈고한 그도 근필처럼 현기증으로 쓰러질 정도로 마치 접신이 된 듯 혼신을 불살라 소설을 썼다.

 지금도 팔만대장경 모조품을 곁에 두고 늘 지켜보곤 한다는 그는 “팔만대장경은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정교해 수십명의 각수들이 새긴 것으로는 믿겨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작품”이라고 경탄했다. 그는 “글자를 직각으로 파버리면 쉬웠을 텐데, 한 획 한 획을 45도 각도로 빗나가게 파서 힘을 분산시켜 글자가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며 “한 글자 쓰고 기도하고 다시 한 글자를 쓰고 기도한 각수들의 신앙과 정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전했다. 그는 “경판이 나무를 바닷물에 3년간 담가 건져내 3년 동안 말린 뒤 다시 소금물에 삶아 옻칠을 했기에 천년이 지나도 벌레가 슬지 않는 세계 유일무이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판경각을 지은 근필을 천재적인 건축가로 손꼽는다. 습기가 없도록 바람은 통하지만 새는 들어올 수 없도록 창문을 꺾어 지어 지금까지도 경판이 완전히 보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인들이 일제 때 파고다공원에 있던 원각사 13층 석탑을 싣고 갔다가 계속 재앙이 생기자 도로 싣고 왔다. 팔만대장경도 가져가려 했으나 그렇게 했다가는 더 큰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결국 포기하고 자기들이 만들겠다고 나섰으나 실패했다.”

 조씨는 “고려 고종 때 무신정치를 펼친 최우가 몽골 침입 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불심으로 병란을 이겨내자’며 대장경 조성을 제안했을 때, 수기 대사는 ‘그런 살인과 약탈엔 힘으로 맞서야지 어찌 불심으로 이겨낼 수 있느냐’며 반대했으나 결국 불심을 모아 대장경을 조성했다”면서 “현재 4900만명인 대한민국의 국가적 역량으로도 해내기 어려운 일을 290만명의 인구로 추산되는 고려시대 때 모든 백성이 몽골군 앞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에서 이 불가사의한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대장경>으로 대문호의 길을 연 조씨는 생의 마지막 작품도 불교의 관조와 해탈을 다룬 이야기를 쓸 꿈을 꾸고 있다. 대장경에 새겨졌던 문자가 불가사의한 그의 손을 통해 생명력을 얻어 이번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설지 벌써부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1.06.06 15:01:18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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