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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識)이란?
관념의 주객관적 그림자는 개체가 가진 무명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사량분별이 생겨나서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그 나타난 그림자는 사실과 같이 우리에게 모양과 소리로 존재하면서 6식(六識)을 움직여 상호작용으로 서로 의존하도록 하고 있다. 이 상호의존성으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직관적인 사고력을 버리고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허상에 마음을 일으켜 본래의 진식(眞識), 자상(自相, 여래장식의 진상)을 잃어 관념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은 그 세상 전부가 아니라 표피로 느끼고 있는 아주 작은 인식일 뿐인데 우리는 그 인식이라는 것이 일부분인 줄 모르고 꼭 세상 전부를 보고 아는 양 치부하여 유무(有無)로 만들고 또 그 만들어 놓은 것으로 근심한다.

근심을 제거해야 하는 출발에 우리의 마음, 뜻, 의식이, 물질과의 조화에서 좀 더 나은 어떤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는 생각은 허황되다. 그 근심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왜 출발하였다고 하는지에 대하여 집중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물을 파야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 자리에 너무 많은 힘을 낭비해서 지쳐버린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듯 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멈추고, 가만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들을 지켜보게 되면, 순환하는 것이 나타나고 사라질 때,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 명백해진다. 이 명백함의 원인에 무엇이라는 이름 없는 그 찰나는 이 모든 것을 텅 비게 하나로 볼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으로 꽉 찬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그것조차 다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엇도 다시 이것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그 순환하는 것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라 하든지, ‘누구’나 ‘어떤 것’에 의지하여 실체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상 작용과 의지하여 온갖 인연으로 생겨난 망심 현상을 내려놓아야 하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고 할 때 이것과 저것은 어떤 것이나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때의 그 지칭은 실체가 아닌 허상이다. 허상이 있으므로 허상이 나타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그 나타난 자체가 실상이니 허상이니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지점을 정확하게 알아야지만 보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더 이상 다음이 진행되지 않는다. 만약 보는 주체를 사실로 알고, 그 다음을 아무리 잘 분석하여 드러내더라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육조스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을 삼았다는 것은 관념의 가진 주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디딤돌을 치워버린 것이다. 우리는 디딤돌을 놓아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건너가려는 마음만 있었지, 바르게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동정(動靜)을 이야기할 때, 어느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지 말자. 움직이지 않는 물질의 관점에서 보면 동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평상시 알고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겠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은 물질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때는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동(動)이고, 계속 움직이게 두는 것이 정(靜)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물질의 생태에 따라 완전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물질의 생태에 따라 완전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알고 있는 어떤 하나에 고정되어 판단하는 것이 생기게 되면, 대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건너가는 주체가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의지해 있던 디딤돌을 치우고, 반연하는 새로운 디딤돌을 놓지 않는다면, 계속 움직이는 것은 더이상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힘을 잃고 모양 없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 그때 스스로의 마음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심지 법문을 수지하고, 수행도 없었고, 증득도 없는, 본래 자각되어 있는, 성스러운 지혜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떠난 자리에 안주하게 된다.

글쓴이 : 지휴 스님((사)여시아문 선원장)

<출전 : 현대불교신문 2023.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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