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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

생사

 

 

노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태어남[生] 또한 무상의 강물에 깃든 것이기에, 생로병사의 존재인 우리는 한계상황 속에서도 발심하여 해탈과 열반, 깨달음과 여래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절실한 문제의식과 진실한 수행정진이 없다면 우리의 신행은 어떤 의미를 띨 수 있을 것인가! 종교의 이름을 빌 것도 없이 투명한 마음으로 묻는다면 이 길 외에 어떤 길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붓다와 불교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인류가 축적한 성현의 지혜 가운데, 현세의 인간관에 머물거나 어떤 절대자에게 맡긴 채 맹동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지(理智)로 삼세를 통관하면서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는 순례의 행렬은 바로 불교도들이다. 불제자들은 이 점에 새삼 커다란 환희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일찍이 만해선사가 ‘조선불교유신론’(1910 탈고, 1913 출간)에서 갈파하였듯이, 인류의 문명이 피안에 이르면 인류의 본원사적 목마름에 응답할 수 있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 달리 없다는 점이 더욱 또렷해진다. 이 자부는 단지 여타 가르침을 하시(下視)하는 오만이 아니라, 인류의 등불로 새롭게 불을 밝혀야 하는 사명으로 인식되고 실천되어야 함을 뜻한다.

윤회전생을 하여도 중생의 욕생(欲生)이 아닌 보살의 원생(願生)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도(상구보리)와 구제(하화중생)가 어우러진 원생의 삶은, 스스로 빛이 되고 그 빛을 뭇 생명에게 비추는 장엄한 중중제망의 법등(法燈)이 된다. 신라의 광덕은 향가 ‘원왕생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 원념(願念)이 비단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정토에 가서 다시 태어나길 서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미타불이 법장보살로 있을 때 48대원을 세워 수행정진하면서,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에게 다짐한 중생제도의 서원이 역동하고 있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대목이 있다. 제5구의 ‘서원 깊으신 부처님’은 중생제도를 실천하리라는 법장비구의 다짐의 결실을 말한다. 왕생과 원생의 서원이 합일되고 있는 것이다. “달이 어째서/ 서방까지 가시겠습니까./ 무량수전 전에/ 보고의 말씀 빠짐없이 사뢰소서./ 서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 곧추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48대원 이루실까.”

우리도 법장비구와 같이, 또 광덕사문과 같이 생과 사를 대한다면 해탈과 열반, 깨달음과 여래를 맞게 되는 것이다. 집착한다고 해도 죽음이 그것을 동행하지는 못한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들은 죽음에 의해 잃게 된다. 죽음 후에 남겨질 뿐인 것을 내 것이라 집착할 것이 아니라(‘숫타니파타’ 4-6-806), 죽음을 직시하여 하루하루를 성자처럼 살아갈 일이다.

“집착을 떠난 성자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이 묻지 않고 구르듯이, 슬픔과 인색함도 그를 더럽힐 수 없다(숫타니파타 4-6-811).”

노쇠하고 연로한 브라흐민(Brahmin, 바라문) 두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선하고 좋은 일이라고는 한 것이 없고, 내생의 두려움에 대한 공덕도 짓지 못하였다고 탄식하면서 가르침을 청하자, 부처님은 “이 세상이 늙음과 질병과 죽음에 의하여 휩쓸려 갈 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이런 자제하는 삶이 귀의가 될 것입니다”고 하면서, ‘이런 자제하는 삶’을 ‘살아있는 동안 공덕 짓기’로 연결 짓고 있다.

“삶은 휩쓸려가고 인생은 짧습니다. 늙음에 다다른 이에게 피난처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행복으로 이끄는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자신을 절제하고, 살아있는 동안 공덕을 지으면 죽을 때 행복과 함께합니다(‘앙굿따라니까야’3).”

마명보살은 건강할 때 복덕을 지으라고 일러준다. “가족이나 친척들이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나에게 비록 재물이 있어도 마음대로 보시할 수 없다(‘대장엄론경’5; ‘불교성전’ 4-1-5).” 내가 죽을 날이 임박하면 가족들이라고 해도 그 재물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인생사이다.

글쓴이 :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출전 : 1609호 / 2021년 11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2021.11.17 16:57:32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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