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비밀번호 로그인 | 회원가입
경전공부를 위한 방
http://www.templevill.com/

daeheungsa    
원욱 (daeheungsa)
경전에 대한 내용을 담도록 하겠습니다.
현각스님 금강경강의
마음
어제 주지스님 모시고 ...
연호사 "지선"님의 글...
한 번 할거 두번 반복...
1번부터 10번까지 맘...
감사합니다. _()_
추억
연승. 성원스님
달리는 큰법당
흠설원
법고창신
 원욱
법원스님이지어주신법명:지효♥
달리는 큰법당

현각스님의 금강경 (최종회)

 

현각스님의 살아있는 금강경 (최종회)


금강경의 진짜 놀라운 점은 완전히 과학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성이론과 완전히 부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소한 시간과 공간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시죠?

책상은 쉽게 부러지거나 연소되니깐 그렇다고 쳐도

최소한 시간이나 공간은 존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난 지금 여기 한국 화계사에 있는 대적광전에 앉아있는데,

이 공간은 존재하는 거잖아. 시간도 존재하는 거 아냐?

그래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쳐도 시간은

존재하는 거 아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은 모두 생각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란 말이죠.

불교의 가르침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제가 이 장의 처음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생각함으로 존재합니다.

데스크라고 말하면 데스크가 되는 것이고, 책상이라고 말하면

책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들어 냅니다.

불교에서만 주장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곧 우주는 모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말이죠.

보는 자의 새끼손가락 또는 엄지손가락에 의한 것이 아닌,

바로 '생각'에 따라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주는 우리의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정말 대단한 이유는 이렇게 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모두 생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원자를 '원자'라고 부르지만, 그건 단지 이름일 뿐이죠?

부처님은 이미 이 원자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또는 시간과 공간 모두가 본래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름과 모양은 스스로의 자성이 없음을 말이죠.

아주 굉장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고요.

이 책상의 모양은...

이렇게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책상은 사실 공한 것입니다.

본래 공 그 자체입니다.

또한 이 공한 가운데 형상이 임시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말이죠.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책상이 진짜 책상이라고 느끼지만,

만약 여러분 눈을 가리면 여러분에게 이 책상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으로는 만질 수 있지 않겠냐구요?

만약 그 손이 없다면요?

눈과 손이 없다면, 책상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혓바닥으로 만지겠다고요? 그럼 혀를 잘라버리겠어요.

이렇게 모든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자,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그 티끌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티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은 곧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의 무리인 까닭입니다."


나무도 곧 나무가 아닙니다.

여기 불교 법문을 처음 들으시러 오신 분에게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정말로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고양이라는

것도 '고양이'가 아닙니다. 강아지도 '강아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지 마세요. 어쩌면 불교의 쇼일 수도

있으니깐요. 대신, 우리 절에 개 한마리가 사는 데요.

가서 한 번 직접 물어보세요. 너 개니?

정말로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

절이니깐 합장 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개님!! 정말 개입니까?

그리고 대답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인간들은 그들을 개라고 불러서 그들은 '개'가 되었습니다.

아주 흥미롭지요?

30장은 바로 이런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은 곧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의

무리인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뿐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티끌들이 모여 잠시

세계라는 형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갤럭시[시계]라는 물건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 세계가 어떠한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완전한 모양과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라도 분리할 수 있어야겠지요.

여기 있는 이런 모든 물건들을 부셔서 먼지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부처님은 이런 모양들을 임시 합쳐진

복합물이라고 하셨답니다. 합성물이라는 것이죠.

완전히 가루가 될 때까지 말이죠.

합성된 물질만이 아닌 합성된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존재성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 이 마이크, 책상, 책, 이 소리 등의 이 모든 것을

부시고 또 부시고 또 부시면, 부서질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잘게 부셔버리면, 마늘을 잘게 써는 것처럼 말이죠.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늘처럼, 책상, 주장자 등의 이 모든 우주가 다 이렇게

공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라도 스스로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작게 다른 물건 등으로 분리시킬 수

없어야겠지 않겠습니까? 이 책상을 부숴버리면, 그냥

나무가 되겠죠. 나무를 또다시 계속 잘게 부수면 원자 등으로

나눠지겠지요. 이렇게 책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존재성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존재성이 있다면, 그렇게 그 물건을 잘게 만들 수 없겠지요.

우주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어떠한 물체라면,

그것을 분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 또한 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뿐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티끌들이 모여 잠시

세계라는 형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일합상, 곧 우리가 부르는 이 우주는 단지 그것을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이름일 뿐입니다.

아주 간단하죠?

자, 다음 내용도 정말 대단합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십니다.


"수보리여!

우주는 그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니라.

어떠한 것이라도 언어로는 그것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말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오직 범부들 민이 이러한 임시적으로 만들어놓은 모든 개념에

집착하고, 답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의 뜻을 아주 쉽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컵인가요?

이것을 컵이라고 말하면 이것의 이름과 모양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컵이 아니라고 말하면, 공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죠. 컵이라고 말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고 미국 사람들은 이것을 컵이라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찻 잔 혹은 그릇이라고 하잖아요.

프랑스 사람들은 '라타스'라고 하고요.

그러니깐 컵이라고 말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 것이요,

이것이 컵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공에 집착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과연 어떠한 말로서 이것의 본성을 설명해야 할까요?

어떤 언어로요?

이것을 설명하는 오직 한가지의 언어가 있긴 있는데 말이죠.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죠.

제발 여기 계신 분 중에서 이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언어를 사용해서 이것을 설명해 보시라고요.

이것을 과연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이것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말일까요? 네?

뭔가를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요?

[How to drink?]

그런데 한국사람이나 말레이시아 사람은 영어로 애기해서

그 뜻을 이해 못할 텐데요?

그건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죠. 죽은 언어입니다.

컵이라고 말하면, 죽은 표현입니다.

'How to drink?'라고 말해도 이미 죽은 표현이구요.

'물잔' 이라고 말해도 죽은 표현이구요.

다 죽은 언어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에게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여기에 200개의 학사졸업장과 300개의 고등학교 졸업장,

60년의 수행과....

맞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자, 언어로는 이것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언어, 크리스챤 언어, 한국말, 영어, 폴란드 언어, 프랑스 언어,

내 말, 네 말, 부처님의 말, 숭산 큰스님의 말, 성철 큰스님의 말,

책에서 읽는 그 어떠한 언어로도, 금강경에 나오는 말로도 이것을

완벽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와 신도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인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아주 심플하죠? 자, 다시 한 번 보시지요.

언어로는 이 컴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

우주는 너무 크니깐 컵으로 바꿔서 말했습니다.

언어로는 이 컵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언어는 완전하지 않은 제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있죠.

아주 아주 쉽지요?

자, 그럼 31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챕터입니다.

법상을 내지 마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상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이해해

법상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하니

그 이름이 법상이다."


재미있습니다.

법상을 내지 말라.

어떠한 종교나 가르침이라도 '자아'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르치면 그건 옳지 않은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주와 같이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큰 우주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이 우주와 구분할 수 있는 '존재' 또는 '자아'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이건 우주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있는 법당에 앉아서 밖을 보시면

여기 법당과 밖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법당 문을 모두 닫으면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문을 닫으면, 이 공간이 분리되어 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집이 하나 있는데 집안 가운데를 나눠서 벽을 세우면

공간이 두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하시면 여러분은 바보~ 입니다.

네, 우리의 틀에 박힌 생각으로는 공간이 두 개로 나뉘어 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공간은 절대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누가 이 거대한 우주를 분리시킬 수 있는

힘이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블랙홀이라고 아시죠?

물리학에서 말하는 엄청나게 강력한 공간과 시간조차 빨아

드린다는 블랙홀이면 그 안에서만은 우주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지난 8~ 10개월 정도

전부터 뭐라고 말하는 지 아십니까?

당연히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이미 말씀하신 내용이지만요.

정말 놀랍게도 말이죠.

요즘 과학자들은 이 블랙홀 또한 그들도 실제로 블랙홀을

한 번도 눈으로 본적이 없거든요. 이 블랙홀이 오직 생각에

의해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블랙홀을 직접 본 적이 없거든요.

블랙홀은 우주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단지 수학적인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죠. 블랙홀이 일어나고 있는 사진조차도

하나 없으니 말이죠. 어쨌든 과학자들의 말로는 블랙홀이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몇 몇 과학자들은 이 블랙홀이라는 것이 단지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것이죠.

블랙홀 이론을 믿는 자들의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가상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요점은 '우주는 둘로 갈라질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의 본성도 둘로 나눠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힘으로도 우리의 본성은 분리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가 죽으면, '그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고 말을 합니다.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사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아상, 인상, 중생상 등과 같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하늘을 쳐다보세요.

제가 태어나서 살았던 뉴저지의 우주와 여기의 우주가 두 개의

다른 우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의 우주 속에 있자나요.

그러나 벽, 분리, 또는 여기에서 저 멀리 만마일 떨어진 곳이라는

이런 종류의 개념 등은 모두 환상인 것입니다.

이런 환상들이 우리가 세상이 분리되어져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 법당안과, 법당 밖이 두 개의 우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인슈타인도 시간과 공간이 모두

상대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미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8000마일 떨어진 장소나, 여기 2인치 떨어진 장소가 사실은

모두 똑같이 한 우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이 모든 것을 이제야 하나씩 증명해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상 혹은 영혼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


그러니깐 어떤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다른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무지한 상상인 것입니다.

영혼의 아주 부분적인 면만 보는 것이지요.

또한 조건적인 것이고요.

영혼 또는 우주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이 없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가까운 곳과 먼 곳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생각이 그런 개념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여기 제 앞에 시계가 있죠. 저는 이게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게 어디에 있는 거죠? '저기요!'

저한테는 '여기'에 있는데요?

여러분은 어디에 있다고 말한다구요? '저기요!'

아니에요! 여기라니깐요! '아니에요 저기에요!

여기에요! 여기! 온 세상이 바로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말입니다.

여기와 저기라는 상대적인 개념 속에서 말이죠.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리를 정말로 모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여기'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저기'지요?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바로 이렇게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정말 단순하게 들리시겠지만, 모든 것은 다 생각[망상]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고 어떤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가지만, 어떤 영혼은 지옥으로 내려간다고

선언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영혼에 대해서 진정으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선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우주 또는 다른 그 어떤 것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나'가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도의 전통 종교에서는 어떤 영혼은 귀족으로

태어나고 다시 귀족으로 윤회하며, 어떤 영혼은 천민으로 태어나

다시 죽어도 그 영혼은 천민으로 환생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혼은 지옥에서 태어나고 어떤 영혼은 천국에서 태어난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그들은 선택 받은 자로서

여기에 이렇게 살지만, 천민들은 이러한 잘못된 종교적 발상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영혼]을 만들어 여기와 저기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생각일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도 오직 생각일 뿐이고요!

아주 아주 분명하고 심플한 가르침입니다.


"아닙니다. 세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낸 이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나와 너, 진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분들은 오직

임시로 지어져서 사용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여기요!

대화하기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오직 생각인 만들어 낸 이름일

뿐입니다. 스님과 리허설도 안했는데, 죽이 짝짝 맞네요.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이해해

법상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하니, 그 이름이 법상이다."


그러니깐 그 어떠한 것이라도 이름 붙여진 것은 그것이 오직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이름 자체도 녹여버리지만, 이것을 녹이려고

만들어낸 법까지 모두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지문이 찾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존재성'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혁명이지만 완벽히 정확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자, 그럼 무엇이 정견[바른 견해]이냐?

진정한 통찰은 무견입니다.

이름을 무치거나 묘사를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견해도 진정한

정견이 아닌 것입니다. 입을 열어 묘사하거나,

이름 부치거나 하는 그 순간, '여기!'라고 지금 부쳤지요?

바로 이런 것은 정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라고 이름 부쳤으니깐요.

무견이 바로 정견입니다.

'여기'라는 개념[견해]을 제가 한번 녹여버릴까요?

지금 4시 19분이네요.

이해가 가세요?

정견[바른 견해]는 아무 견해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견해, 저기 견해, 불교적인 또는 기독교적 견해, 한국적

혹은 미국적인 견해, 남성 또는 여성의 견해, 과거 또는 미래의 견해,

종교적인 견해, 역사적인 견해, 이런 모든 견해를 다 쓰레기통에

버리십시오. 그리고 볼 때는 오직 볼 뿐!

들을 때는 오직 듣고! 냄새 맡을 때는 오직 냄새 맡을 뿐!

맛 볼 때는 맛 볼 뿐입니다.

느낄 때는 아~ 땀이 나네요.

이것뿐입니다.

이 견해는 '견해'가 아닙니다.

재밌습니다.

금강경의 6장에 보면, 부처님은 뗏목을 버리라고 하시지요?

당신이 가르친 법까지 뗏목처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이 가르침을 잘 사용해서 유심히 통찰하라고요.

단, 이렇게 해서 얻은 견해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우리 금강경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볼까요?

마지막 장 또한 전의 31장과 같이 매우 심플합니다.

심플하다는 말이 쉽다는 뜻이 아니라요.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요.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은 절대로 애매한 또는 복잡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하지요.

요점 요점마다 굉장히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32장도 마찬가지로 이 전의 31장 모두와 심플합니다.


겉모습은 모두 환상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우주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일으켜 이 경전을 수지 또는 사구게를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클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꿈이나 환상,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다 말씀하시고 나자, 수보리 및 모든 비구와

비구니, 재가의 남녀 수행인, 세간의 선, 인, 아수라가 모두 부처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자기 갈 길을 걸어 나갔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습니다.

이 위대한 가르침의 설법이 끝나자 모두 기뻐하고, 마음에 깊이

가르침을 새기며 머릿속으로 말고요-

각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떠납니다.

우리가 조금 있다가 그렇게 하겠죠?

자, 부처님은 다시 한 번 이 테마를 언급하십니다.

바로 '보시'입니다.

보시 보시 보시 보시!!!

제가 처음부처 말씀드렸듯이, 보시의 종류는 참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열어 도와주고

사랑하며, 이렇게 참 많은 종류의 보시가 있답니다.

이런 종류의 모든 보시는 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보시는 말입니다.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깨달아서, 종이위에 있는 이 글자들 말고요.

이 네구절만이라도 확실히 깨달으면, 이미 이 사람은 훨씬 큰 복을

얻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다녔던 하버드나 예일대학의

그 어떤 교수들 보다 더 많이 말이죠.

어렵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수행입니다.

머릿속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구전으로 옮겨져 외우고 그 뜻을 실천으로

옮겼지만요. 어쨌든, 이 금강경의 어떤 네 구절이라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커다란 금 덩어리처럼 말이죠.

금강경의 4조각만이라도 깨달아서 실제 생활에 실천하게 되면,

인생 최대의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니까요.

어떤 고통이요?

모든 망상에서부터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금강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망상의 고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신경전문의나 책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실제로 깨닫고, 일상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말이죠.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우주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하고,

또한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일으켜 이 경전을 수지,

(확실히 실행으로 보여준다는 뜻이죠.)


또는 사구게를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기억하시죠?

이 컵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입으로 벙긋벙긋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컵을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금강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말로서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몇 장 전에 이미 말씀하셨지요?

진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고요.


"이 경전을 수지 또는 사구게를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클 것이다."


아, 여기 국제선원에 보시하는 것 빼구요~

자, 그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어떤 식으로 설명해 주어야 할까요?

잘 들어 보십시오.

바로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모든 가르침은 사실 여기서 끝납니다.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말이죠.

이게 전부입니다.

무엇을 볼 때는 눈으로 확실히 보고요.

들을 때는 있는 그대로 듣고요.

냄새 맡을 때는 있는 그대로 냄새 맡고요.

혀로 맛을 볼 때는 그대로 맛을 보고요.

몸으로 느낄 때는, 아~ 땀이 촉촉이 나네요.

아~ 정말 시원한 손수건이네요,

이것도 진리이고요.

이렇게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금강경을 설명하는 것이

제대로 금강경을 설하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제대로 가르쳐 주자나요.

어떻게 금강경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야 하냐구요?

순간 순간 오직 하면 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게 바로 금강경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 어떠한 다른 말도 필요 없습니다.

자, 그럼 금강경의 마지막 가르침을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온 세상은 ....

이 세상이 과연 무엇일까라고 의문이 생기면 말이죠.

아침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별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침에는 밝아서 별이 보이지 않자나요.

분명히 있기는 한데 하늘이 밝아져서 보이지 않지요?

또한 물거품과 같이 생각하세요. 물거품이요.

물거품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겉모양은 있긴 한데, 단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의 삶도 여기 계시는 이동수씨의 삶도, 성시은의 삶,

관해스님의 삶, 또한 제 현각의 삶도 모두 물거품과 같이 임시적인

삶인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아는 분 계신가요?

이 세상에 나오지 전 그 시간들을 기억하시는 분 계신가요?

없죠~ ?

이렇게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한 모양의 물거품은 바로 그 전의 물거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을 못하지요. 삶은 이렇게 물가에 있는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벽의 별과 같고, 물 위의 물거품과

같으며, 여름 하늘에 내리치는 벼락과 같은 것...

몇 주 전 홍콩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그날 밤에 4,500개의 벼락이 내리쳤답니다.

약 5주 전의 일이었습니다.

신문 1면에 났던 기사였어요.

저는 그날 밤 선원 발코니에서 와우 와우~ 하면서 신나게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와~ 저것 봐~ 하면서 말이죠.

다음 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어제 4500개의 벼락이 내리쳤다는데 혹시 보셨어요?'

'그래요? 전 한 두개 밖에 못 봤는데요. 설마요~'

그러자 저는 신문을 보여드렸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삶이 이렇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벼락이 순간 내리치고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또한 하나의 불빛과도 같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 천장에 있는 전등을 생각하시지요?

아니요. 2500년 전에는 양초밖에 없었을 겁니다.

옛날 계룡산 신원사 파고다 석탑 앞, 단상이 하나 있었는데요.

단상 위에 두개의 양초가 항상 있었답니다.

벽암 큰 스님께서는 양초에 항상 불이 켜져있기를 원하셨는데요.

그래서 젊은 스님들이 항상 저녁 예불 전에 불을 붙이곤 했답니다.

그런데 촛불은 항상 금새 꺼져버려서 스님들이 다시 쪼르르 달려가

불을 붙여야만 했죠. 우리는 선방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곤 했는데요.

그 스님이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촛불을 켰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벽암 큰 스님이 그 스님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시켰던 것 같습니다.

큰 스님은 그 젊은 스님에게 '무상'[항상 변함]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말이죠.

그래서 그 젊은 스님은 머리를 좀 써서 콜라병을 거꾸로 세워서

바람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하루에 몇 번씩 불이 꺼졌답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이처럼 매우 위태한 촛불의 심지와

같은 것입니다. 한 순간 죽을 수 있는 우리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내일까지 살 수 있을 지 아무도 모르자나요.

3개월 뒤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약속하고 떠나도 어쩌면

이 중에 한 분은 세상을 잠시 떠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삶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 한분은 말이죠.

앗! 저를 포함해서요.

'그리고 허깨비와 같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허깨비를 봤다고 하셨는데요.

삶은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허깨비는 이와 같이 한 순간의 환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삶은 이렇게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 이 삶이 모두 이와 같이 꿈과 같습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 꿈이 실제와 같이 느껴지지요.

신나는 일이나, 화, 공포, 의심, 걱정, 혼란함 등의 이런 모든 감정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꿈에서 깨는 순간, 하~ 정말 바보 같다.

꿈이었을 뿐인데~ 라고 하지요.

그런데 혹시 아세요?

바로 지금도 어제 꾼 꿈처럼 똑같이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요.

만약 지금 망상에 빠져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모든 생각은 끊어 버리면,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부처께서 이 경전을 다 말씀하시고 나자 수보리 및 비구와 비구니

재가의 남녀 수행인, 일체 세간의 천, 인, 아수라가 모두 부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며 자기 갈 길을 걸어 나갔다."


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이 있네요.

경전의 처음에는 비구니가 없었거든요.

경전의 마지막에는 비구니를 포함, 모두가 다 부처님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부처님의 높은 가르침에 기뻐하고 있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는 조금 슬픈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삶이 풍전등화와 같다고 해서 말이죠.

하지만 사실 아주 좋은 뉴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점을 깨달으시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시와 공을 초월하고, 오고 감도 없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금강경의 강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나중에 또 헷갈리시면,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늘이 진리를 가르쳐 드릴 것입니다.

................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_()_ [끝]

 

                         

                           성불하십시오. _()()()_ [청암]

 

 

2007.03.02 14:29:15 | 내 블로그 담기
달리는 큰법당   감사합니다. _()_
2007.03.03 03:20:11
스팸댓글 또는 악의적인 댓글의 제한을 위해 사찰에서 블로그를 개설하신 후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12345678910
Today 1 Total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