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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일본의 건국시조는 바로 한반도 도래인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는  일본 인덕릉에서 출토된 귀중한 유물이 있는데 그 유물은 1) 청동거울인 (수대경 중국후한시대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동경과 쌍둥이처럼 닮음), 2) 봉황조각이 금과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환두대도 손잡이 부분, 그리고 3) 제사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방울 그리고 4) 말의 장식품인 마탁(기마민족들이 신분적 위엄을 과시할 때 사용했던 마구)이 보관되어 있다.


1872년 9월 폭풍으로 인해 토사가 붕괴되어 석관이 노출되었고 그 석관에서 철제 금동제 갑옷과 투구와 같은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 출토된 유물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재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유물들은 일본 현지 인덕릉 근처에 있는 사카이 박물관에 가면 ‘전(傳)인덕릉 출토품’이라는 타이틀 아래 사진들만 전시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은 어떻게 인덕릉에서 기마민족의 유물들이 출토된 것일까?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사카이 지역에 가면 모즈역(백설조역)이 있는데 인덕릉의 정식명칭 백설조이원중릉에서 따온 것이다.



인덕릉은 전장 486m로  일본 최대 고분이며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왕릉과 더불어 3대 고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모양새는 앞에는 사각형, 뒤에는 원형 모양인 전분후원분이며 그 모양이 꼭 열쇠구멍과 같은 형태이다.  그 거대한 언덕 같은 고분을 3중으로 판 해자 [垓子]가 둘러싸고 있다.



그 고분에서는 가야식 토기인 스에기가 발견되었는데 스에기는 5세기경 한반도에서 전래된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이다. 스에기라는 뜻은 한국어 ‘쇠’라는 의미와 마치 철같이 단단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즉 마치 철과 같이 단단하고 검은자기를 스에키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스에기의 발견은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왕족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바로 패망한 금관가야 왕족들이 바로 일본으로 도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국경이 없이 자유롭게 일본을 왕래하던 시절이었음으로 금관가야 왕족들은 일본으로 도래한 후 정착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였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또한 일본이 아직 국가적 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금관가야인들이 도래하여 일본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과 같은 외교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였을 것으로 본다.



인덕릉 바로 앞에 있는 사카이박물관에는 고분을 조형했다고 추정되는 도래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의 발굴 사진이 걸려있는데 그 지역을 도읍 (도요지), 즉  토기를 굽는 도요지(가마터)의 마을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지역에는 토사(土師)라는 불리 우는 씨족이 살고 있었는데, 토사(土師) 즉, 이들은 문자 그대로 흙의 스승을 뜻한다고 한다.


철과 같은 단단한 검은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은 철을 만드는 제철 기술과 무관하지 않다. 제철은 1000도 이상의 고온을 다스릴 줄 아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쇠와 같은 단단한 토기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고온을 다스릴 줄 아는 기술이 없다면 만들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5세기 금관가야인의 도래와 함께 일본에서는 그 당시 최첨단공법으로 만들어지는 토기기 생산된 것이다. 이는 철의 왕국 금관가야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금관가야가 멸망한 5세기 초 일본에서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위와 같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이끌어낼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 연합국에 패한 금관가야인들이 어디로 간 것일까?



바로 일본의 하제(土師)마을이다.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을 하제(土師)마을이라고 일본역사는 불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제마을이 있었던 자리에는 유물이 발견된 후 유적지를 메우고 거기에 하제소학교를 세웠다. 하제소학교 체육관터가 바로 하제씨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문화유적이라면 남의 것도 자기 것이라 우기는 일본이 왜 그랬을까?

바로 아래와 같은 시구가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산자는 죽은 자의 무덤을 덥고 죽은 자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일본은 자신의 일본건국의 씨족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랍시인 호메로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지나가 버린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 되지만 다만 지나가 버린 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래서 추적해본 곳이 바로 하제씨의 다른 본거지인데 그 곳이 바로  하제노고오(하제씨들의 고향)는 하제씨의 본고장이다.


일본의 도명사 천만궁이라는 곳에 가면

하제요적(하제의 가마터)이 있는데 그 도명사 입구 석비에는 노미스크네라는 인물이 새겨져있다.



노미스크네는 누구인가?

순장대신 무덤 주위에 진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토용을 넣자고 제안을 한 공으로 일왕으로부터 이곳의 성과 봉토를 하사 받고 하제씨들의 씨조가 된 인물이 바로 노미스크네이다.


사실 도명사 천망궁은 후대에 지어진 것이고 원래의 기능은 하제씨의 시조인 노미스크네를 모시던 신당이었다.


그는 분명히 5세기 초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장이 바로 노미네스크였던 것이다.




그리고 천만궁 보물창고에 가면 또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스가와라 미치자네(845-903)이다.

스가와라는 59세의 나이로 죽은 일본 최고의 학신으로 화혼한재(和魂漢才, 중국 것을 받아들이되 일본의 혼을 통해 일본화해야 한다는 것 )의 인간이라고 불릴 만큼 한학의 대가이자 뛰어난 사상가였다.

지금도 천망궁은 스가와라라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곳인데 일본에서 입시생을 둔 학부모들이 많이 찾아와서 합격을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창고에 보면 스가와라가 사용했던 빗이나, 거울 등 개인 소지품이 남아있는데 그 유물을 보면 스가와라가 하제출신, 바로 금관가야출신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스가와라는 하제마을에서 자라나 학문을 익힌 바로 금관가야의 왕이었던 김수로왕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점은

도명사 천만궁에는 스모장이 있는데

스모는 일본의 국기스포츠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전통스포츠이다.

스모는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신을 모시는 의례라고 전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금관가야왕국의 후예로 알려진 노미스쿠네가 일본에서 최초로 스모를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이마노케하야라는 매우 힘이 센 장사가 있었는데 노미스쿠네가 선발되어 대결을 하였다고 한다. 이 대결에서 노미스쿠네가 지금의 스모와 같은 기술로 상대를 이겨 이 근방의 영지를 부상으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하제씨가 이 근방에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가와라와 더불어 노미스크네는 문과 무를 겸비한 가야인의 적손이었을 것이다. 가야왕족의 후예인 노미스크네가 최초의 스모를 한사람이라고 할 때 일본의 국기인 스모원형에 가야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하제마을(일본 하제토사역에서 내리면 갈 수 있다)에서는 또 하나의 거대 고분, 응신릉을 볼 수 있는데 응신릉은 일본고대사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15대 일왕이었던 응신은 인덕의 아버지로 응신왕의 무덤인 것이다.


그럼 누가 어떻게 그 거대한 고분을 만들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그 당시 도래인이었다. 즉 도래한 금관가야인들이 그 고분을 만든 것이다.


인덕릉은 연 인원 140만명이 동원되어진 세계최대 분묘이며 응신릉 또한 그 쌓아놓은 흙의 양만으로 따졌을 때는 인덕릉을 능가하는 규모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어떤 기술로 이렇게 거대한 인공릉을 축조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천만궁에 가면 쉽게 알 수 있다.

도명사 천망궁에가면 돌과 같은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사용하는 슈랴(수레)가 있는데 거대한 두 고분을 인공적으로 성토하고 돌을 쌓아올리는 석축기술이 가능했던 것은 하제씨의 본거지에서 발견된 슈라(수레)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5세기 초 수십만 명의 현지민을 동원해서 불가사의한 왕릉을 축조할 수 있었던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은 바로 금관가야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일본 학계에서는 응신을 7대 불가사의라고 뽑고 있다.

왜냐하면 응신이전의 고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마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에 응신릉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전혀 연계되지 않은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본학계에서는 응신의 돌현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응신은 누구인가?

이 의문은

금관가야 대성동 고분에 묻혔을 왕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라는 질문과 함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응신의 출생지는 어디일까?

여러 학설이 있지만 후쿠오카 우미신사가 바로 응신이 태어난 곳이라고 전한다. 일본서기는 신궁왕후가 신라 정벌을 끝내고 오늘날의 규슈인 츠크시에서 응신을 낳았다고 전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일본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다케하라 고분에 가보면 채색 벽화를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주작과 현무와 같은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한반도 고유양식이 전해져 그려진 것으로 안내하고 있다.


벽화는 바다를 건너서 말을 배에서 끌어내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어디선가 배를 타고 일본에 건너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에서 말을 끌어내리며 망명한 사람들이야 말로 바로 가야인들이 아니었을까?

‘삼국지위지왜인전’에는 일본에서는 소, 말이 없었다고 기록되고 있는데 응신이후 일본에 등장한 소와 말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일본 학자들은 응신이전의 역사를 허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응신이 일본의 건국의 시조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일본 역사학자들은 인정하고 있지 않다.


금관가야가 멸망했을 때 민족 대이동을 통해 후쿠오카에 상륙한 일본의 아버지가 바로 응신이었는데 말이다. 응신은 일본에 정착한 후  말을 타고 동쪽으로 정복활동을 시작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일본서기 신대기에 나오는 일본최초의 왕, 신무의 신화적인 동정으로 윤색되어져 있다.


또한 일본의 건국신화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모방해서 드라마틱하게 각색되는데 이는 자신의 출생기록을 숨기려는 교묘한 은폐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광개토왕의 5만 대군에 패한 가야왕조는 일본으로 대 이동을 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 왕조가 바로  150년간 존속한 가와치 왕조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가야문명은 백제문화로 유입되면서, 가와치 왕국의 맥은 끊기며 바로 일본의 아스카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의 후지산을 보면 항상 만년설에 덥혀있다.

만년설에 덥혀있는 후지산 처럼 일본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만년설에 감추어놓기만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영원히 감추려고만 했던 사실들이 하나둘 밝혀 질 것이다.

바로 대성동고분의 제 4제국 가야제국은 비밀로 가득한 일본의 역사를 수면에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는 일본의 문을 열 수 있는 빗장이며 우리 문화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둥인 것이다. 21세기 고도의 문명을 지향하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교차점에선 우리 민족의 완성해야 할 미완의 왕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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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4 18:25:33 | 내 블로그 담기
관여래   이글은 퍼온 글 입니다.
오랜만에 최인호씨 역사소설 제4의제국을 읽으며... 흥미로와서 올려봅니다.
2009.07.24 18:37:08
적경   공부 잘했슴다.
2009.07.31 22:4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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