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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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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mgang    
금강 (kum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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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5) 금강(金剛), 다이아몬드 혹은 벼락에 대하여

서언(5) 금강(金剛), 다이아몬드 혹은 벼락에 대하여


제가 쓰는 글이, 단도직입,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창 뜸을 들이거나, 괜스레 에두른다는 핀잔을 자주 듣습니다. 선사(禪師)인 함허가 <금강경>의 주석을 모으고, 거기다가 자신의 장황한 해설(說誼)까지 덧붙이는 그 지극히 반정통적(?) 작업을 두고, 한 말씀 더 해 두려다가, 나중으로 미루고, 그만 <금강경>의 세계로 들어갈까 합니다.

당장 마주치는 것이 제목입니다. 제목의 뜻부터 살펴보겠는데, 그런데 사실이지 제일 어려운 곳이 이곳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제목의 짧은 몇 마디에는 경전의 전 내용과 취지가 압축 파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제목을 보고, 아하, 하는 사람은 더 이상 경전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목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을 더듬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책을 펴면 본문부터 코를 박습니다. 그러나 때로 본문을 일일이 더듬어 놓고도 제목의 취지가 사무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아직 책을 충분하고도 완전히 읽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어려운 책일수록 그렇습니다. 저는 해설서들이 서문이나 개요에서 이 지점을 적절히 찌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아서, 저자의 안목과 책의 가치를 따져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 또한 원효 스님이 <대승기신론소>에서 지적하듯, ‘잎을 따느라 줄기를 놓치는(把葉而亡幹)’ 우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대승이 기신한다?
지난해 원효 스님의 저술 영역 사업의 중간보고를 겸한 학술발표가 있었습니다. 아니, 지지난해 11월이군요. 뉴욕 스토니부룩의 박성배 교수님께서 하신 일갈, 사자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씀인즉슨, 수많은 석학 교수들과 스님 선지식들이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을 해석하고 해설해 왔는데, 정작 ‘대승(大乘)’이 무엇인지를, 그 당체(當體)를 아무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추어라 반쯤만 얼굴이 따가웠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신 분들이 많았을 것으로 압니다. 역시 근본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 말이 나온 김에 외람되이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박 교수님께서는 이어, 그 ‘대승’의 진면목을 ‘깨닫는’ 정도로는 안 되고, ‘깨쳐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저는, 순전히 제 식으로, 아마도 지눌 스님이 말씀하신 해오(解悟)와 증오(證悟)의 간격을 강조하시나 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은 <대승기신론>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리, 파격적으로,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로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아마도, 대승기신을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킨다”로 읽게 되면, 자연히 능소(能所), 즉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생기게 되고, 이것은 안팎도 너와 나도 없는 소식인 ‘깨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십분 고려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 딜레마의 해법으로 그분은 대승(大乘)과 기신(起信)을 체용(體用)으로, 다시 말하면 기신을 대승이라는 본체의 ‘자연적 활동’으로 읽으셨습니다. 이 해석은 그러나, 용서하십시오, 후학의 눈에는 정말 지나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하시면, ‘논(論)’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대승이 ‘중생들의 마음’이라고는 하나, 다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생사(生死)의 바다를 부침 윤회하고 있기에, 그 진실을 일깨우고 믿음을 증장(增長)시켜 주기 위해 이 ‘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원효 스님 자신이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논문에 의지하여 중생들의 믿음을 일으킨다(依此論文 起衆生信)”라고요. 박 교수님은 구경(究竟)에 초점을 맞추느라 <대승기신론>을 위시한 경전들이 갖고 있는 방편(方便)의 역할을 너무 도외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문제는 강의 도중 본격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금강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벼락을 가리킨다?
얘기가 곁가지로 흘렀습니다. 제목과의 대결을 피해가지 말라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지요. <금강경>은 약칭이고, 정식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여기 능단(能斷)을 덧붙여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기도 합니다. 제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금강’, ‘반야’, ‘바라밀’, ‘경’이 그것입니다. 첫 항목부터 차례차례 살펴보기로 합시다.

금강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금강경>을 영역하면서 ‘Diamond Sutra’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번역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이아몬드를 다들 금강석(金剛石)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과시 금중최강(金中最剛), 무엇이든 부수지만, 그 자신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금강석의 속성이 지금 이 경전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금강이, 즉 산스크리트어의 ‘바즈라(Vajra)’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바즈라는 인드라 신이 갖고 다니는 무기인데, 이것은 다름 아닌 ‘벼락’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금강저(金剛杵)입니다. 이 물건을 한번씩 보신 적이 있을 줄 압니다. 손잡이 양끝에 예리한 칼날이 달려있는 방망이로, 둘레에 연꽃과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밀교에서 특히 중시한 의식용 도구인데, 지금도 호신부로 팔고 있습니다. 전재성 교수님의 대역본 <금강경>은 이 견해에 입각해 ‘번개처럼 자르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는 이 책 안에서 위대한 찬불시인이었던 마뜨릿체따가 금강을 두고 “무지의 어둠을 쫓아버리는 태양, 교만의 산맥을 부수는 인드라신의 무기”라고 읊은 노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2006.01.03 11:56:48 | 내 블로그 담기
적경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광대해서 각자의 신념따라 해석하며 굴절시켜 받아들이기 일쑤 인듯 싶습니다. 놀이 마당이지요. 모든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나 해석과 부연 설명이 많을 수록 본질에서 멀어 지기도 하는듯 합니다 .
가끔들러 배워갈까 합니다. 좋은 강의 부탁드립니다. _()_
2007.03.06 08: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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