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비밀번호 로그인 | 회원가입
해동마을
http://www.templevill.com/

lwd555    
현담 (lwd555)
늘 초심을 생각하며..............................
사는이야기
불교상식
불교법회 및 행사
불교 이야기
경전산책
경전공부
법문
좋은 글
웃고살기!
사찰순례
찬불가
우리나라 사찰이 최고이...
조찬기도회는 공식적인 ...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죠...
천수경도 명강의 이지만...
청양 정해사 인가요 ?
룸비니 동산
Here and Now
흰여울 rapids
활구참선 수행
도라지꽃
jihphoto
바다를 이고 앉아서
바람
문수행
지혜림 나연실
 현담
지혜림 나연실
새벽
흰여울 rapids
오직 할 뿐
산산수수
연이
붓다의 메아리
그루터기
단공..그리고 건강
길있는 길
화이트칼라
맑은하늘의 생각 나누기
ZERO POINT
바람
연승. 성원스님
달리는 큰법당

고창 선운사 사찰순례기

 

도솔산 선운사(兜率山禪雲寺) 사찰순례기

 

<*10여 년전 불교에 처음 입문하였을 때는 처음 가보는 사찰순례날이 되면 학교 다닐 때 소풍가는 것처럼 설레고 기다려졌는데 지금은 초심은 어디로 가고 그냥 의무적인 순례가 되어가는 것 같다. 물론 안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또 순례기도 전에는 꼬박꼬박 정성들여서 잘쓰고 했었는데 어느 때인가부터는 달랑 사진만 올리고 있었다.>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本寺)이다.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707(숙종 33)에 쓰여진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創修勝蹟記)는 전자의 설을 취하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밤에 좌변굴(左邊窟진흥굴, 도솔암 밑에 있다.)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였으니 이것이 이 절의 시초라고 하였다. 이 창건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고 하는 사실에 따라 형성되었겠지만, 당시에 이 지역이 신라땅에 속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또 검단의 창건설을 보면 위덕왕 24년은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지 2년 뒤에 해당한다. 그런데 검단과 해구(海口)에 있는 검단리(檢旦里)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 옛날에 검단선사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에 해안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하였다는 것이다. 두 설은 모두 설화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 뒤에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354(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였고, 1472(성종 3)부터 10여년 동안 극유(克乳)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극유는 1472년에 이 절에 이르러 뜰에 구층석탑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하였다. 그는 이듬해 2월 제자 종념(終念)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이 쓴 원문(願文)을 얻어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 해 여름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의 재목 1,000여 그루를 3척의 배에 싣고 왔으며, 1473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웠다. 그리하여 1474년에는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짓고,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이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동상실(東上室금당(金堂능인전(能仁殿) 등을 짓고, 또한 영산회(靈山會)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의 중창불사로 인하여 선암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건물이 189채나 되는 웅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608(광해군 즉위년)부터 1609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승려 수십 명이 선방(禪房) 한두 개 소를 먼저 지은 뒤 몇 년 동안에 법당 3칸을 지었다. 1613(광해군 5) 봄에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에게 중창을 부탁하자 일관은 원준(元俊)과 더불어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았다. 그리고 어실을 빙자하여 고창 문수리에서 재목을 얻어 먼저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중창은 6년 만인 1619년에 끝을 맺었다. 그 뒤 1707(숙종 33)에 이르기까지 일관·원준 등의 선사들이 서로 계승하여 거듭 건물을 세우고 화상을 조성하는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1698년에 김우항(金宇杭)이 쓴 선운사중신기(禪雲寺重新記)에는 중수에 참여하고 당시 선운사에 살고 있던 대중 260여 명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찰규모와 조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1707년에는 현익(玄益)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를 지었다. 1839(헌종 5) 비로 인해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졌다. 이에 찬성(贊誠의홍(義弘성찬(誠贊) 등이 법당과 향운전(香雲殿)을 수리하고 정문(正門)의 기와를 갈았는데, 1840년 가을에 중수를 마쳤다. 이 때의 중수내역을 기정진(奇正鎭)무장현선운사대법당사적기 茂長縣禪雲寺大法堂事蹟記에 기록하여 남겼다. 1965년 팔상전을 중수하였고, 1970년 성보전시관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운사 사적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殿閣寮舍創建年代芳名列目)이라는 제목 아래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시기의 선운사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영산전·관음전·팔상전·명부전·만세루(萬歲樓산신각·천왕문·대방(大房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정면 5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선운사금동보살좌상(禪雲寺金銅菩薩坐像), 보물 제280호인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영산전목조삼존불상(靈山殿木造三尊佛像)을 비롯하여 약사불상(藥師佛像삼존불좌상·보살입상(菩薩立像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像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판관상(判官像녹사상(錄使像사자상(使者像십대왕상(十大王像동자상(童子像판관상·호법신장상(護法神將像,

仁王像팔상전석가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인 6층석탑, 31호인 범종, 그리고 중종과 부도(浮屠탑비(塔碑)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중에서도 금동보살좌상과 지장보살상 등은 미술사적으로도 주목되고 있다. 동불암(東佛庵)의 마애불상(磨崖佛像)은 높이 13m, 너비 3m이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와 탑비 중에는 김정희(金正喜)가 쓴 백파대사사적비(白坡大師事蹟碑)와 채제공(蔡濟恭)이 쓴 설파대사사적비(雪坡大師事蹟碑)가 있고, 절 아래 마을 입구의 오른쪽 밭 가운데 선운사동구라는 시를 새긴 서정주(徐廷柱)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이 밖에도 이 절 주변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당황하여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龍門窟), 조망이 뛰어난 만월대(滿月臺),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이 절에 속한 산내(山內)의 암자가 무려 50여 곳이나 있었다. ,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상도솔(上兜率기출암(起出庵천리암(泉利庵수선암(修善庵연대암(蓮臺庵성대암(聖臺庵수다사(水多寺동암(東庵도성암(道成庵청풍암(淸風庵천등암(千燈庵광정암(廣井庵), 1618년에 인해(印海)가 창건한 내원암(內院庵), 1665년 학철(學哲)이 중창한 석상암(石床庵), 1666년에 학철이 창건한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1674년에 영조(靈照)가 창건한 백련암(白蓮庵), 1672년 사준이 창건한 상남암(上南庵), 1676년 처인(處忍)이 창건한 중남암(中南庵), 1693년 천성(天性)이 창건한 동운암(東雲庵), 1658년 한해인(韓海印)이 창건한 하도솔(下兜率), 1702년 거사(居士) 최태신(崔太信)이 창건한 북도솔(北兜率), 1699년 명우(明祐)가 창건한 미륵암(彌勒庵), 영조가 창건한 수도암(修道庵), 1596년 정도암(鄭道巖) 등이 창건한 고암굴(高巖窟), 1573년 상일(尙日)이 중창한 은선암(隱仙庵)이 있다. 1576년 상조(尙照)가 중창한 은적암(隱寂庵), 1582년 경신(敬信)이 중창한 상암(上庵), 1583년 성문(性文)이 중창한 월출암(月出庵), 1575년 철심(哲心)이 중창한 의경암(義敬庵), 1710년 해운(海雲)이 머물던 명심암(明深庵), 1709년 경문(敬文)이 창건한 한산전(寒山殿), 1707년 지휘(智輝)가 창건한 백운암(白雲庵), 1713년 태경(太敬응묵(應默봉흠(峯欽) 등이 창건한 성도암(成道庵) 등의 30여 암자와, 이름만이 보이는 20개 암자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운암·석상암·참당암(懺堂庵도솔암 등 4개의 암자만이 남아 있다. 특히 도솔암의 내원궁(內院宮)에 봉안된 선운사지장보살좌상은 보물 제280호이고. 선운사참당암대웅전은 정사각형 맞배집으로 구포(九包)장식의 건축양식이 독특한데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다.<출전 : 선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솔암은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선운사.도솔사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 곳에 신라왕이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여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배경하에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었던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애불좌상이 조성된 이래 이불상의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사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와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솔암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 1200,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출전 : 선운사 홈페이지 산내암자 자료>

 

연일 미세먼지로 인하여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고 건강에 한층 유의하면서 살아야 하는 요즘이다. 2018421일 오늘은 우리 정혜사 봄 사찰순례 날이다. 고창 선운사와 도솔암 그리고 청보리축제를 순례하기 위한 일정이다. 아침 610분에 3대에 버스에 분승하여 일산을 출발하였다. 오늘은 맑은 날씨에 미세먼지도 많아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흐릿하기도 했지만 고창에 도착해서는 맑은 날씨였다. 서산휴게소와 군산휴게소에서 잠시 쉰 후에 선운사에는 1015분에 도착하였다.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지 꽃들은 만발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꽃이진 동백나무와 신록들이 파릇파릇하게 맞아 주었다. 마침 해설사분이 오셔서 친절이 맞아주며 설명을 해 주었다. 선운사 정문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도솔암으로 향하였다(선운사에서 2.3km), 길이 넓어져 버스로 갈 수 있다고 하여 편하게 도솔암까지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 뜨문뜨문 산행객들이 걸어가고 있었으며 계곡에도 제법 맑은 물이 많이 있었으며 아직은 엷은 연두색의 신록으로 본격적인 봄철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가을에 왔을 때, 단풍이 무척 아름다웠었는데 봄날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도솔암에 도착하여 대웅전에 참배하고 경내에 한 그루의 왕벚꽃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어서 몇 몇 도반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위에 있는 마애불상으로 올라갔다. 많은 도반님들이 참배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애불상은 미륵불로서 6.25때 전쟁의 상흔으로 여기저기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바로 위에 있는 내원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계단을 올라갔다. 예불시간이라 전각마다 스님들이 예불을 올리고 있었다. 청아한 염불소리와 짙어가는 신록들과 어울려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해 주었다. 다시 도솔암에서 선운사로 내려와 공양간에서 점심 공양을 하였다. 선운사 보살님들이 정성껏 준비해준 비빔밥을, 자주 먹는 절밥이지만 맛있게 먹었다. 공양 후에 대웅보전에 참배하고 해설사님을 따라서 영산전·관음전·팔상전·명부전·만세루(萬歲樓) 등 전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봄날의 경내를 순례하였다. 따뜻한 봄이라 우리말고도 많은 관광객들이 선운사를 순례하고 있었다.

14시에 선운사를 출발하여 인근에 있는 청보리밭에 가기로 하였다. 오늘이 축제 개막날이라 하였다. 19KM를 가니 푸른 보리밭이 보이며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넓은 주차장에 자동차가 가득하였다. 다행히 우리 버스도 무사히 주차장에 주차하고 보리밭을 산책하였다. 넓은 보리밭사이로 다니면서 사진 촬영도 하고, 개막식이 거행되고 있어서 식장에도 잠깐 들러보았다. 지역에 유지분들이 모두 모여 있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먹거리 장터에서 오뎅국 등 간단히 요기를 하고 15시에 축제장을 출발하였다. 서해고속도로, 서산에서 공주로 나와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를 거쳐서 죽전휴게소에서 쉰 후에 일산에는 1950분에 도착하였다. 차가 약간 막히기는 했어도 무난히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 도반님들이 자신이 서원하고 있는 바를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다짐하였으리라 생각한다. .

 

    2018년423일 저녁, 현담(10여 년 전 처음 사찰순례할 때는 호기심과 순수한 신심으로 꼬박꼬박 순례기를 썼었으나 몇 년 전 부터는 게을러져 사진만 올린 것 같아, 이번에도 마지못해서 졸필로 올려보았음. 다음에는 좀 더 심도 있고 감동적인 순례기를 쓰기를 다짐하면서...,)

 

 

2018.04.23 20:17:00 | 내 블로그 담기
스팸댓글 또는 악의적인 댓글의 제한을 위해 사찰에서 블로그를 개설하신 후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12345678910
Today 415 Total 1633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