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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결집

 불교 경전의 결집

 

 

 

제1차 결집석가모니가 입멸한 직후, 마하가섭의 주도하에 500명의 불제자들이 라자가하(Raja-gaha,王舍城)근처의 영취산 칠엽굴에 모여 7개월간 이어졌다. 왕사성 근처라서 ‘왕사성 결집(王舍城結集)’ 또는 500명의 불제자들 즉 아라한들이 모였다고 해서 ‘오백결집(五白結集)’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1차 결집은 교단이 존속하고 석가모니의 교법이 정리되어 오늘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제1차 결집에서 석가모니가 어느 때, 어느 곳, 누구 앞에서, 어떠한 설법을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어떠한 감명을 받았는지를 서로 상의하여 석가모니가 설법한 형식으로 전송하였다.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하였고 다음에는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들은 사람이 모두 환희((歡喜).예배(禮拜)하고 돌아갔다는 문구로서 정리하였다. 이렇게 성립된 경전은 2차 결집 때 까지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제자에게서 그 제자에게로 구전되는 경전이었다. 이런 점에서 1차 결집은 경전의 성립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결집이었다. 500여명의 비구들이 모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암송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어떻게 정리되어 전승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계기라는 점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다. 현재 전해지는 근본불교의 경전이 이 당시의 결집과 정확히 일치하는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문자가 사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전이 200여 년간 전해질 수 있었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이기 때문이다.

 

제2차 결집석가모니 입멸 후 100년경에 개최된 것으로 전해진다. 2차 결집은 ‘베사리성 결집’ 또는 ‘칠백집법’이라고도 하는데 8개월간 소요되었다. 2차 결집이 개최된 원인은 중인도 마갈타국의 상업도시인 바이샬리(Vaisali, 毘舍離)에 거주하는 비구들이 독자적으로 정한 10가지의 계율(十事)이 기존의 율과 배치된다는 문제를 따지기 위한 결집이었는데, 이 십사의 가운데에서도 “금이나 은을 신자로부터 받는 것은 괜찮은가”하는 것이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당시 동인도 바이샬리 교단에서는 비구들이 신자로부터 시주를 받으면서 금, 은을 받아 분배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는데, 율에 철저한 야사(Yasa Kākandakaputta)가 이를 비법(非法)이라고 비난했지만 바이샬리 비구들은 승가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야사를 오히려 비난하였다. 이렇게 하여 옳고 그름에 대해 시비를 가린 결과 비구들의 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단정하여 야사의 견해가 옳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로 인하여 불만을 품은 많은 수의 진보적인 비구들이 따로 결집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인도불교의 근본분열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2차 결집도 1차 결집처럼 문자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경을 토대로 계율이 완성되어 부파불교의 공동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제3차 결집 제2차 결집 후 다시 100여 년이 지난, 아쇼카왕(Asoka)에 이루어 진 것으로 전해진다. 아쇼카왕이 불교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상좌부 교단뿐만 아니라 여러 부파의 불교도들이 아쇼카왕의 후원을 얻으려고 상좌부에 합류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안이한 생활을 바라고 출가하는 자가 많아져 화씨성 계원사에는 6만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외도들이 승려를 가장하고 교단에 끼여 들어 교단의 화합을 깨뜨렸다. 승단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못갈리풋타 티샤(Moggaliputta-tissa)가 아쇼카왕의 지원을 받아 파탈리풋타(Pataliputta)에서 교설의 확정과 승중의 화합을 도모 하도록 하였다. 외도 승려들을 추방하고, 1,000명의 비구들이 모여 9개월에 걸쳐 삼장(三藏 : 경장, 율장, 논장) 전체를 편찬한 것으로 전승된다. 제3차 결집은 ‘화씨성 결집’ 또는 ‘일천집법’이라고 하는데 3차 결집 때 비로소 약 200년 동안 구전되어 오던 경전을 문자화 하였다.

 

제4차 결집2세기 전반 대월지국 카니시카왕(Kaniska) 때 협존자(脇尊者)와 세우(世友)가 중심이 되어 500여 명의 비구가 카슈미르의 환림사에 모여 삼장에 해석을 붙이는 회의를 하였다. 제4차 결집은 삼장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그러한 삼장에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설편찬의 범주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4차례 결집 후에도 경전편집회의는

 

미얀마에서 제5차, 6차 결집이 행하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석가모니의 교설(敎說)과 제자들의 구전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문자로 작성하면서도 서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주석을 가하고, 요약하며 또는 윤색(潤色)하면서 어느 정도의 변화는 불가피 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 등지의 대승불교권의 여러 경전들은 서기 100년경부터 약 1천 년 간 여러 설법이 추가되면서 오늘날의 경전이 성립되었다.

 

출전 :  2011.11.30. 해동마을 블로그 - 불교 경전 개설(3-2)

 

2018.02.17 21:49:02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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