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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9월8일 일요법회

201998일 일요법회

 

바라밀합창단음성공양 : 바람 부는 산사, 청산은 나를 보고

 

관행 스님 법문 : 삼명경(三明經, Tevijja Sutta, D13)

 

삼명경(Tevijja-sutta)디가 니까야의 열세 번째 경이다. 이 경의 이름인 삼명(tevijja, 三明)’은 불교에서 쓰는 의미와 바라문교에서 쓰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 불교에서는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宿命智),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天眼智), 모든 번뇌를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漏盡智)를 삼명(三明)이라고 한다.

 

바라문교에서 삼명은 삼베다를 의미한다. 삼베다란 리그베다(Ṛg-veda), 야주르베다(Yajur-veda), 사마베다(Sāma-veda)를 말하는데, 베다는 바라문교의 경전을 말한다. 이러한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을 떼윗자-브라흐마나(tevijja-brāhmaṇa, 三明婆羅門)라고 부른다.

 

부처님은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자신들의 가르침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그들이 바른 종교적 수행의 길로 인도하는데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 혹은 방편설법이라고 하는데 듣는 사람의 근기와 수준에 따라서 다양한 비유를 사용해서 듣는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많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신다. 여기 삼명경에서도 많은 비유가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비유를 통해서 한층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세존께서는 500명 정도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꼬살라를 유행하시다가 마나사까따라는 꼬살라의 바라문 마을에 도착하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마나사까따의 북쪽에 있는 아찌라와띠 강 언덕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그때 와셋타(Vāseṭṭha)와 바라드와자(Bhāradvāja)라는 두 바라문 수행자가 범천에 태어나는 방법에 대해 서로 논쟁하고 있었다. 와셋타는 뽓카라사띠(Pokkharasāti)의 제자였고, 바라드와자는 따룩카(Tārukkha)의 제자였다. 그들은 자기 스승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른 길이며 벗어남으로 인도하고 그대로 행하면 범천에 태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붓다시대 바라문들의 주된 관심사는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범천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주로 논쟁했다. 그때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라는 두 바라문 학도가 자기 스승의 가르침이야말로 범천에 이르게 하는 바른 길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하였다. 그러다가 두 바라문 학도는 이 문제에 대해 붓다께 여쭈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붓다를 찾아가서 뵙고 묻게 된다.

12. “와셋타여, 그런데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 가운데 어느 한 바라문이라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와셋타여, 그런데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느 한 스승이라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와셋타여, 그런데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느 한 스승이라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와셋타여, 그런데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일곱 세대 전의 스승들의 계보 가운데 어느 한 스승이라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13. “와셋타여, 바라문들의 선조가 되는 자들이 있었나니, 그들은 만뜨라를 만들고 만뜨라를 설한 선인(仙人)들이었다. 지금의 바라문들은 (그 선조들이) 노래하고 설하고 모은 오래된 만뜨라 구절들을 따라 노래하고, 따라 설하고, 설한 것을 다시 따라 설하고, 말한 것을 다시 따라 말하나니,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웻사미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는 범천은 어디 있는지 범천은 어떻게 있는지 범천은 언제부터 있는지 이것을 알고 나는 이것을 본다.’라고 말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14. “와셋타여, 이와 같이 참으로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 가운데 어느 한 바라문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없다.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느 한 스승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없다.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스승들의 스승들 가운데 어느 한 스승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없다.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일곱 세대 전의 스승들의 계보 가운데 어느 한 스승도 범천을 직접 본 자가 없다.

바라문들의 선조들이 되는 자들이 있었나니, 그들은 만뜨라를 만들고 만뜨라를 설하는 선인들이었다. 지금의 바라문들은 (그 선조들이) 노래하고 설하고 모은 오래된 만뜨라 구절들을 따라 노래하고, 따라 설하고, 설한 것을 다시 따라 설하고, 말한 것을 다시 따라 말하나니,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웻사미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이다. 그런데 그들도 나는 범천은 어디 있는지 범천은 어떻게 있는지 범천은 언제부터 있는지 이것을 알고 나는 이것을 본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의 일원이 되게 하는 길을 가르친다. 이것이야말로 곧은 도요 이것이야말로 바른 길이니 벗어남으로 인도하고 그대로 행하면 범천의 일원이 되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되고 만다.

와셋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으로 이와 같으므로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참으로 이와 같으므로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이 되고 맙니다.”

15. “와셋타여, 참으로 삼베다에 능통한 그 바라문들은 이것이야말로 곧은 도요 이것이야말로 바른 길이니 벗어남으로 인도하고 그대로 행하면 범천의 일원이 되게 한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의 일원이 되게 하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서 장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와셋타여, 예를 들면 눈먼 자들이 줄을 지어서 서로서로 닿아 있는데 처음 사람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와셋타여, 그와 같이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이 설한 것은 장님 줄서기와 같다고 생각되는구나. 처음 사람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사람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의 이런 말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오직 이름뿐임이 밝혀지고 만다. 허망하게 되고 만다. 공허하게 되고 만다.”

그러시고 나서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녀의 비유사다리의 비유를 설하신다. 아찌라와 띠 강의 비유를 설하신다.

 

아찌라와띠 강의 비유

29. “와셋타여, 예를 들면 이 아찌라와띠 강이 까마귀가 마실 수 있을 만큼 넘실대는 물로 가득 차있다 하자. 그때 저 언덕으로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온다고 하자. 그는 이쪽 언덕에서 머리까지 (덮개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다 하자. 와셋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아찌라와띠 강의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30 “와셋타여, 그와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있나니 성스러운 율에서는 이것을 덮개라고도 부르고 장애라고도 부르고 가리개라고도 부르고 씌우개라고도 부른다. 무엇이 다섯인가? 감각적 욕망의 장애, 악의의 장애, 해태혼침의 장애, 들뜸후회의 장애, 의심의 장애이다. 와셋타여, 이들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있나니 성스러운 율에서는 이것을 덮개라고도 부르고 장애라고도 부르고 가리개라고도 부르고 씌우개라고도 부른다.

 

와셋타여,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이들 다섯 가지 장애에 덮이고 방해받고 가리고 씌어 있다. 와셋타여,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바라문들이 행하는 법들을 버려 버리고 바라문들이 행하지 않는 법들을 받아 지니면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에 덮이고 방해받고 가리고 씌어 있다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범천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이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

39.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께서는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하신다.’라고 들었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 제게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바라문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셋타여, 그렇다면 들어라.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하리라.”

그러겠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라고 와셋타 바라문 학도는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42.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며, 학습계목들을 받아 지녀 공부 짓는다. 유익한 몸의 업과 말의 업을 잘 갖추고, 생계를 청정히 하고, 계를 구족하고,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고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76. “그는 자애[]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78. “다시 와셋타여, 비구는 연민[]이 함께한 마음으로 같이 기뻐함[]이 함께한 마음으로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고통 없는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

79. “와셋타여, 예를 들면 고동을 부는 자가 힘이 세면 별 어려움 없이 사방에서 다 들을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와셋타여, 그와 마찬가지로 이처럼 평온을 통한 마음의 해탈을 닦은 자에게, 제한된 [욕계의] 업은 여기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여기에 더 이상 정체해 있지 않는다. 와셋타여, 이것도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이다.”

80. “와셋타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와 같이 머무는 비구는 소유물이 있는가, 소유물이 없는가?”

소유물이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적대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적대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오염된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오염된 마음이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자유자재한가, 자유자재하지 않는가?”

자유자재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81. “와셋타여, 참으로 비구는 소유물이 없고 범천도 소유물이 없다. 그러면 소유물이 없는 비구가 소유물이 없는 범천과 합류하고 합일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와셋타여, 참으로 소유물이 없는 비구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소유물이 없는 범천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이런 경우는 존재한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의 귀의

82.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와셋타와 바라드와자 바라문 학도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 귀의한 청신사로 받아주소서.

 

(디가니까야 1, 각묵스님, 초기불전연구원, 2005, pp583-614.에서 발췌함)

 

인간의 구원은,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신에 제사를 지내고 희생물을 올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생활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해탈을 누리고 죽어서는 자신의 업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된다. ,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행위의 결과임으로 악한 것을 제거하고 항상 선하게 살아야 함을 설하신다.

 

201999일 저녁, 경전의 내용이 너무 길어서 관행 스님이 쓰신 원고 그대로를 옮겨 적었음, 현담^^^

 

 

2019.09.09 16:43:34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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