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네 가지 지혜바탕은 같고 이름만 다를 뿐이다
원순스님 송광사 인월암
# ‘여덟 가지 식’이 ‘네 가지 지혜’가 되고 ‘네 가지 지혜’가 ‘세 가지 몸’이 된다고 하는데, 어떤 식들이 모여 네 가지 지혜를 이루는 것입니까?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이 다섯 가지 식이 함께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이루고, 제육식은 의식으로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며, 제칠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고, 제팔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룬다. 또한 제팔식은 중생이 지은 모든 업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으므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한다.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여덟 가지 식은 눈, 귀, 코, 혀, 몸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식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다섯 가지 알음알이와, 이것과 동시에 뜻으로 분별하는 현재의식인 육식(六識), 무명(無明)으로 인해 팔식(八識)의 모습이 처음 드러날 때 그것을 집착하여 ‘나’라고 하면서 현재의식 속에 잠재의식인 칠식(七識), 인식의 활동이 너무 미세하여서 순수한 마음상태와 같아 보여 알 수가 없는 무의식인 팔식(八識)을 말합니다. 이 여덟 가지 식은 모두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식작용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 이 마음이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망상덩어리인 줄 알아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부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 맑고 깨끗한 마음에서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니, 이 지혜를 여덟 가지 식과 관련지어 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라고 나누어 말하기도 합니다.
깊고 맑고 고요하여 오롯하게 밝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대원경지’이다. 온갖 경계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온갖 성품이 공이니, 온갖 성품이 공인 것이 ‘평등성지’이다. 모든 육근의 경계에서 그 실체를 잘 분별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자유자재한 것이 ‘묘관찰지’이다. 모든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인연 따라 쓰되 삼매 속에서 차별하는 모습이 없는 것이 ‘성소작지’이다.
네 가지 지혜는 모두 부처님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 마음자리에서 여덟 가지 식을 견주어 볼 때 이름만 달리 부를 뿐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깊고 맑고 고요하여 밝고 큰 거울처럼 오롯하게 밝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환히 비추어 빠짐없이 그 실체를 아는 지혜가 있으니 이것이 ‘대원경지’입니다.
부처님은 온갖 경계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나’라는 경계도 공(空)인 줄 알고 온갖 경계의 성품도 공(空)인 줄 알아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사라져 차별이 없는 평등한 마음자리에서 드러나는 부처님의 지혜, 이것이 ‘평등성지’입니다.
부처님은 육근의 경계에서 보고 듣고 맛보아 일으킨 알음알이와 대상 경계가 모두 공인 줄 알아 집착하거나 시비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언제나 한마음으로 대상경계의 실체를 자유자재하게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니, 이것이 ‘묘관찰지’입니다. 또한 부처님은 삼매 속에서 차별하는 마음 없이 몸을 쓰는 지혜를 일으키니, 이것이 ‘성소작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지혜는 오식, 육식, 칠식, 팔식으로 단계별로 ‘성소작지’가 되고 ‘묘관찰지’가 되며 ‘평등성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드러나는 지혜가 ‘대원경지’요, 이 지혜가 차별 없이 평등하게 쓰이는 것이 ‘평등성지’입니다. 육근에서 오묘하게 관찰하여 부처님 지혜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판단하는 것이 ‘묘관찰지’요, ‘나’라는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부처님의 몸이 되어 온갖 경계를 있는 그대로 투명한 구슬처럼 인연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성소작지’입니다.
[출전 : 불교신문3443호/2018년11월24일자,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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