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충만’ 자체가 선정과 지혜중생, 알음알이로 결코 이 마음 알 수 없어
원순스님 송광사
‘텅빈 마음이 집착 없는 마음’
시비 분별하는 마음 사라져야
선정과 지혜 고루 쓰며 해탈
선정이란 중생의 시비분별이 다 사라진 텅 빈 충만 그 자체 부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 마음은 어떤 모습 어떤 경계도 없으므로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한없이 맑고 밝아 온갖 것을 다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 드러나더라도 텅 빈 마음 그 자체는 조금도 영향을 받거나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부처님의 선정이라고 대주스님은 말합니다.
원문 번역: 문) ‘말로 설명할 것이 없음’을 선정이라 하는데, 지금 말로 설명할 때도 선정이라 할 수 있습니까? 답) 지금 말한 선정이란 ‘말로 설명하는 것’과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을 논하지 않는 영원한 선정이니 무엇 때문이겠느냐? 선정의 성품을 쓰고 있으므로 ‘말로 설명하여 분별’할 때에 ‘말로 설명하여 분별하는 그 자체’도 선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텅 빈 마음으로 색을 볼 때 ‘색을 보는 그 자체’도 텅 빈 마음이고, 색을 보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을 때에도 텅 빈 마음이며,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도 텅 빈 마음인 것과 같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품이 텅 비어 있으므로 어떤 곳에서도 다 텅 빈 마음이기 때문이다. 텅 빈 마음은 집착이 없는 마음이요, 집착이 없는 마음은 선정과 지혜를 고루 함께 쓰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보살은 이처럼 선정과 지혜를 고루 함께 쓰는 텅 빈 마음 그 법으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얻게 되므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함께 쓰는 것이 해탈이다”라고 말한다.
강설: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시비 분별한 것이므로 이 마음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시비분별하지 않는 마음이 선정인데, 지금 대주스님처럼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선정이라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질문한 사람은 지금 말로 설명할 것이 없는 것이 선정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주스님께서는 이 선정은 말로 설명하는 것과 설명하지 않는 것을 논하지 않는 영원한 선정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손가락이 크다 작다를 논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마음 선정 속으로 들어가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드러나니, 이 공덕이 드러나는 모습이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이 공덕으로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역할이나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분별이 떨어진 선정 속에 있으므로 집착이 없어 시비 분별하는 중생의 마음이나 외도의 삿된 견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텅 빈 마음으로 색을 볼 때 ‘색을 보는 그 자체’도 텅 빈 마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텅 빈 마음이므로 색으로 드러나는 온갖 경계를 보는 데 집착이 없어 텅 빈 마음속에 그 경계를 그대로 드러낼 뿐, 어떤 분별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별도 하지 않는 것은 텅 빈 마음속에 시비 분별하는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 없으니 내가 보고 분별하는 색으로서 어떤 경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곧 이 자리는 주객의 경계가 사라지는 곳입니다.
중생의 알음알이로 헤아려서는 결코 이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시비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져야 비로소 선정과 지혜를 고루 쓰며 해탈할 수 있습니다.
[출전 : 불교신문3418호/2018년8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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