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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혼설

무영혼설

 

혜인스님 조계종 교육아시리

 

영속적 자아 있다는 것은 미망·집착

모든 현상은 생멸변화무상

영혼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면

감각기관은 필요하지 않을 것

 

 

존자 나가세나여!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왕이시여! 영혼이란 게 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눈으로 빛깔이나 형태를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피부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사물을 분별하는, 그런 작용의 주체가 되는 개체적 자아가 영혼입니다. 이를테면 이 궁전에 앉아 있는 나는 어느 창으로든 바라보고자 하는 대로 창을 통해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즉 동쪽의 창을 통해서 바라볼 수도 있고, 서쪽, 북쪽, 남쪽의 창을 통해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내면에 존재하는 개체적 자아(영혼)’는 보려고 생각하는 바의 어느 문(, 감각기관)에 의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다섯 가지의 문()을 말씀드릴 테니 들어 주십시오. 만약 내면에 존재하는 개체적 자아가 보려고 생각하는 바의 어느 문(, 감각기관)에 의해서도 볼 수 있다면 이 개체적 자아는 눈()에 의해서 빛과 형태를 보고, (), (), (), (), ()에 의해서도 빛과 형태를 틀림없이 보아야 합니다. , , , , , 뜻이 모두 음성을 들어야 하며, 냄새도 맡고, 맛도 보고, 접촉도 해야 하며, 사상을 식별할 수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존자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망창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면 허공을 통해 빛과 형태를 한층 더 잘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의 문(, 감각기관)이 제거된다면 내면에 존재하는 이 개체적 자아는 빛과 형태를 더 잘 볼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 , , 몸이 제거되었을 때 한층 더 잘 듣고, 잘 맡고, 잘 맛을 보고, 잘 접촉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시여! 눈의 식별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눈과 빛깔과 형태에 의함입니다. 더욱 그것과 함께 촉감, 지각, 의사, 통일작용, 생명력, 주의 작용 같은 것도 동시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다 연(, 조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靈魂)의 문제는 기존 인도철학에서는 아트만(ātman, , 個我)이라 하여 <우파니샤드>와 베단타학파에서는 생사를 넘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로 여겨졌다. ‘아트만(ātman)’은 원래 호흡’, ‘()’을 뜻하며 숨 쉬는 생명을 가리켰다. 따라서 아트만()이 신체에서 떨어지면 인간은 생명을 잃게 되지만, 아트만은 죽거나 파괴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신체로 이동해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영원불멸의 본체이고, 고정적 실체이며 몸과 마음의 작용을 주재(主宰)하는 원리이다. 질문에서도 영혼은 나의 몸과 마음을 주재하는 개체적 자아가 따로 있다고 정의하며 보고, 듣고 하는 등의 작용을 주관하는 영혼’,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지 묻고 있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생멸(生滅)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으로, 그 안에서 영원의 본체나 실체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끊임없이 무아(無我, anātman)임을 설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이고 변치 않는 자아(또는 영혼)가 존재한다는 미망과 집착은 오래도록 끈질기게 무아와 대치하고 있다. 감각작용을 영혼이 주관한다면 감각기관은 필요치 않다. 영혼이 보고 들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각기관영혼>이다. 다만 눈이 있고 대상이 있을 때 이것이 조합되어 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주재자(主宰者)는 어느 곳에도 없다.

 

[출전 : 불교신문3691/20211116일자]

2021.11.22 15:22:58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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