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하지 않는....,
증오범죄 (헤이트 크라임, hate crime)
다른 인종이나 국적, 종교, 성적(性的)취향을 가진 사람들, 혹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발생하는 범죄. 기존의 전통적인 범죄와 완전히 다른 범죄유형이 아니라 기존의 범죄유형에 편견이 더해진 범죄를 가리킨다. 인종차별에 근거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백인중심주의 기반의 미국의 노예제도와 흑인대상 범죄나 이에 반발하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 성적 차이를 갖고 있거나 장애인에 대한 범죄를 포함한다.
‘나’는 주체라고 인식되는 ‘자아’에 의해서, 경험하여 형성된 앎을 ‘내가 주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다. 나는 대상이 있어야만 존재하고 대상도 내가 있어야 존재한다.
불교를 믿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불교의 핵심가치인 ‘無我’, ‘無常’에 대하여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론적으로만 그려지는 한계를 느끼곤 한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지금 이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 ‘나’는 누구인지? 헷갈리기만 하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 ‘나와 너를 구분하지 말고, 매사를 분별하지 말고, 너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가르침으로 차별, 분별하지 않는 자비심을 베풀라는 것이다. 또 ‘공수래 공수거’로서 ‘내 것이다’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인연에 따라 임시로 존재하며, 항상 하지 않으며 늘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생도 삶에 있어서는 늘 분별을 하고, 내 생각만 옳으며, ‘나’라는 존재는 주체적인 존재로서 ‘너, 남’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고정된 생각은 나의 사유 범위를 더욱 고착화 시키고 있다. 특히 이념적, 사상적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않지만 때때로 강한 증오심을 발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양극단으로 갈려져 있다. 정치적으로 힘 있는 자는 법치를 부르짖으며,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힘이 좀 약한 자는 절차적 정당성의 결여, 설득력 부족, 일방 통행식 등의 주장을 하며 몸으로 저항하고 있다. 돈이 없는 약자들은 부자들에게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손쉽게 돈을 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부러우면서도 시기를 하고, 돈 있는 부자들은 은연중에 없는 사람을 얕보며, 여러 활동 영역에서 소위 ‘갑질’을 해댄다. 사회적으로도 계층간, 세대간, 직업군간, 노사간 등등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고, 흠집을 내며 자기들이 유리한대로 자기주장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금방 나라가 절단 날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의 본연의 모습으로 망하지 않고 끝가지 갈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절충적자본주의의 본 모습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우리 사회의 큰 병폐는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도 그러하지만 국가의 정책도 믿지 못하고, 심지어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하는 여론조사 자체도 불신하고 있다. 나아가서 우리나라 주요 방송사의 보도나 토론 등도 공정하지 못하다고 불신하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은 믿지 못하는 당사자에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동안 조사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여론조사, 교묘하게 엮어서 방송하는 보도기사...,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포장해서, 어느 편을 눈에 보이지 않게 유리하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국민들에 눈에는 편파적으로 보이고 있다. 나도 역시 그러한 점을 많이 인식하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정의란 이름 앞에 법을 앞세워 무소불위로 벌어지는 형태는 자칫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이 더욱 차분해 지고, 다수가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우려야 하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폄하할게 아니라 한번쯤은 귀담아 듣는 배려가 필요하다. 사회 모든 전반에 걸쳐서 늘 약자를 위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약자는 절대적 약자가 아니라 상대적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종교간의 극단적인 테러도 자신만의 이념과 교리만 옳고, 상대방의 생각은 처단해야할, 없어져야할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들이다. 일반적인 이념과 사상보다, 종교적인 이념과 사상이 더 무서운 것은 종교는 지극히 무조건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종교(宗敎)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정의 된다.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평안과 행복을 주고, 악(惡)을 배제하고 선(善)을 행하며 살아가고자 종교를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현재의 종교는 일부일지, 다수일지는 모르지만 종교가 인간의 삶에 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나 생각된다. 물론 불교는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극단적이지는 앉지만, 비종교인들이 볼 때, 그래도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행동하여야 되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펼치신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하고 실천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고 하겠다.
오늘도 이 좋은 봄날에, 순간순간 부딪히는 불편한 감정을 제어하고 순화해 나가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겠다. 나와 너가 다름을 인정하고,...., 나부터!!!
2019년5월1일 오전, 현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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