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형이는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만큼 학문이 성숙했다.
그런데 문제는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학문을 이끌어 줄 마땅한 선생이 가까이에 없었다.
예전 같으면 지방의 향시(鄕試)에 합격하면 서울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나 갑오경장으로 교육제도가 개편되어 폐지되고 말았으니 향시에 장원을 했으되 합격증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무용지물이었다.
그 동안에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사서삼경을 읽었으나 할아버지가 안 계시고 보니 다른 곳의 서당에 간다 해도 기껏 사서삼경을 가르치는 정도였으므로 이미 사서삼경을 마친 그가 갈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찬형이는 아버지께 신학문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신학문이란
고종 23년(1894년)에 있었던 갑신정변 이래 세력을 잃었던 개화파가 1896년 갑오경장을 일으켜 일본의 힘으로 재래의 문물제도를 서구식으로 바꾸고 서양의 학문을 가르키면서 시작된 학문이다.
개혁의 바람은 정치, 경제는 물론 교육 분야에도 몰아닥쳐 지금까지의 인재 등용문인 과거제도가 페지되었다.
과거제도가 페지되니까 자연히 서울의 성균관과 사학, 지방의 향교와 서당 등 재래의 교육기관은 쇠퇴하고, 이들 교육기관을 담당하던 예조는 학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
고종은 홍법 14조 중 제 11조에 \\"나라의 총명한 자제를 널리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를 배워 전하는 일\\" 이라고 교육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제도를 개혁하엿다.
그리하여 교육소칙을 내리고 보통학교령, 중학교령 등을 공포하고 서양식 학교를 세워서 운영하였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가 섰으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보통학교는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평양고등보통학교 뿐이었다.
평양에는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어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길은 신학문을 배우는 길밖에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별로 지원자가 없었으나 나중에는 경쟁률이 치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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