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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원의 대념처경 강해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궁극의 목표는,

맹목적 믿음이 아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노력해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않아 좋은 결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노력이 없으면 알아차리지 못해 청정하지 못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집중이 되지 않아 번뇌가 일어납니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서 어리석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출발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환자가 의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범부가 현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수행자가 정법을 따르지 않고 삿된 법에 현혹됩니다.

 

믿음이 없는 것의 특징은 들뜨고 의심이 많아서

바른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을 말씀드렸을 때,

다섯 번째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은

열반에 도달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뜻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주석서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큰 스님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삼장법사인 쭐라나가 장로는 이것이 예비단계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도라고 말했고

그의 스승인 삼장법사 쭐라소마 장로는 이것을 혼합된 도라고 말했습니다.

 

“스승님, 예비단계가 아닙니까?”

“오, 벗이여. 혼합된 것이네.”

 

이렇게 스승이 계속 주장하자 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일어났습니다.

스승인 장로는 목욕하는 곳으로 가서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혼합된 도라고 했고, 쭐라나가는 예비단계의 도라고 받아들인다. 누가 맞는가?’

그는 경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외웠습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이와 같이 7년을 닦는 사람들은’ 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출세간의 도를 증득하고 7년을 머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가 혼합된 도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쭐라나가가 예비단계의 도라고 본 것이 옳다’라고 깨닫고,

초여드레 법회가 열리는 날 대중이 운집한 곳으로 갔습니다.

 

옛적에 장로들은 법문듣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법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반드시 가야하리,

내가 먼저 가겠다’라고 모두 법문이 있는 곳으로 운집했습니다.

 

그날은 쭐라나가 장로가 법문을 할 차례였습니다.

그가 법상에 앉아 부채를 들고 첫 번째 게송을 읊었을 때 스승은 그 법상 뒤에 서서,

외진 곳에서 따로 앉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옛적에 장로들에게는 질투심이 없었습니다.

사탕수수 다발을 끌어안듯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거머쥐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합당한 것을 받아들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은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여보게, 쭐라나가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스승님의 목소리가 아닌가’ 라고 알아차리고 법문을 멈추고

“왜 그러시옵니까, 스승님이시여.” 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쭐라나가여. 내가 혼합된 도라고 한 것은 옳지 않다.

그대가 말한 예비단계의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도라는 것이 옳다.”

 

쭐라나가 장로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스승님은 모든 교학에 통달하신 분인데,

삼장을 섭렵하셨으며 많이 배우신 분이시다.

이 문장은 실로 이런 분들에게도 혼란을 일으키는데,

미래의 수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일어나게 할 것인가.

그러니 나는 경을 두루 섭렵하여 이런 질문에 대해 동요가 없도록 해야겠다.’ 라고

 

무애해도에서 유일한 길은

도의 예비단계의 도인 알아차림의 도를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네 가지 이고, 팔정도는 최고로 수승하며,

법들 가운데서 탐욕을 여읨이,

인간들 중에서는 눈이 있는 분이 최고로 수승하다.

견해의 청정을 위해서는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요, 다른 것은 없다.

그대들은 이 도를 닦아라. 마라의 군대를 쳐부술 것이다.

이 도를 닦아 그대들은 괴로움을 종식시킬 것이다.’ 라는

경을 인용하여 그는 뜻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도(道)라는 것은 어떤 뜻에서 도인가요?

열반으로 간다는 뜻에서,

열반을 원하는 자들이 가야한다는 뜻에서 도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두 분은 삼장법사이셨습니다.

삼장법사이시면서도 이렇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주석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묵시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경전의 다음 구절은, ‘중생을 정화하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중생의 마음을 정화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의 마음은 여러 가지 번뇌들로 더럽혀져 있고 오염되어 있습니다.

거의 항상 마음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집착, 갈망, 탐욕, 미움, 성냄, 무지, 자만심, 부러움, 질투 등이 있습니다.

 

집착은 수행자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법은 수행자의 마음을 정화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탐욕, 미움, 망상, 자만심 등 번뇌들을 갖지 않습니다.

수행할 때 이런 것들은 모두 수행자의 마음에서 없어집니다.

수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의 마음은 정신적 번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것입니다.

이 길로 나아감으로서 수행자는 최고의 단계인 경지에 도달할 것이고,

수행자의 마음은 정말로 순수할 것입니다.

 

그 다음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으로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현재 다가오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면 번뇌가 없어집니다.

수행자가 최종단계인 아라한의 깨달음에 도달하면 슬픔과 비탄을 모두 극복합니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후에 슬픔과 비탄이 다시 수행자에게 오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슬픔과 비탄을 극복했습니다.

 

다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픔이란 육체적인 고통을 뜻하고, 고뇌란 정신적인 고통을 뜻합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고통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이 얼마동안 앉아있으면 몸에 통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꾸준히 통증을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집중력이 강해지고

결국은 그 고통이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고통을 극복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고뇌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최고의 단계에 도달했을 때 모든 고통과 고뇌를 단번에 극복하게 됩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두 가지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소멸시키기 위해서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도를 닦으면 띳사 장로 등과 같은 육체적 고통을,

제석천과 같은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합니다.

 

한 예가 있습니다. 사왓띠에 띳사라는 거부 장자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천만의 황금을 버리고 출가하여 마을 없는 숲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생의 아내가 가서 그를 죽이라면서 500명의 도적들을 보냈습니다.

그 도적들은 그곳에 가서 장로를 포위하고 앉았습니다.

 

그러자 장로가 물었습니다.

“거사님들이시여,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그러자 도적들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왔소.”

 

그러자 띳사 장로는 말했습니다.

“거사님들이시여, 나를 믿고 하룻밤만 지난 뒤에 죽이시오.”

 

그러자 도적들은

“사문이여, 이런 곳에서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는 큰 돌을 들어 자신의 두 무릎을 잘라버리고

“거사님이여, 이제 믿을 수가 있겠소?” 라고 물었습니다.

 

도둑들은 장로의 극단적 행동을 보고 잠시 물러나서 그 거사를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장로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의 계행을 반조하고

청정한 계행에 의지하여 희열과 기쁨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 순서대로 위빠사나를 증장시켜 삼경에 이르러 사문의 법을 성취하여

여명이 틀 무렵에 아라한과를 얻고서 다음의 감흥을 읊었습니다.

 

“두 다리를 잘라 그대들에게 보여주리라.

애욕을 가진 채 죽는 것이 실로 걱정스럽고 부끄럽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통찰하여

여명이 틀 무렵에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노라.”

 

이렇게 장로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위대한 죽음이라는 것이 윤회가 끝난, 지고의 행복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삼십 명의 비구들이 세존께 명상주제를 받아 숲 속의 승원으로 우안거를 갔습니다.

그들은 “도반들이여, 밤의 삼경을 모두 사문의 법으로 행합시다.

서로의 곁으로 가지 맙시다.” 라고 각자 수행처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들이 사문의 법도를 행하며 이른 아침에 졸고 있는 동안

어떤 호랑이가 와서 비구들을 한명씩 물고 가 버렸습니다.

누구도 다른 비구들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봐서

호랑이가 나를 물고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보름 동안 열다섯 명의 비구들이 잡아먹혔습니다.

 

그러자 보름 후 포살 때

“도반들이여, 다른 비구들은 어디로 갔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부터 호랑이에게 물려 가면 물려간다고 말을 합시다,” 라고

말하고서 서로 각자의 수행처로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젊은 비구가 같은 방법으로 호랑이에게 잡혔습니다.

그는 “호랑이입니다, 스님.” 이라고 크게 말했습니다.

 

비구들은 몽둥이와 횃불을 들고 그 비구를 구하려고 쫓아갔습니다.

호랑이는 비구들이 오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서

발가락부터 그 비구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비구들은 “비구들이여,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이런 상황에서는 비구들의 특별함만이 통할 뿐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호랑이의 입에 들어가면서 고통스러운 느낌을 누그러뜨리고,

위빠사나를 증장시켜 발목이 먹힐 때 수다원이 되었고,

무릎이 먹힐 때 사다함이 되었으며, 배꼽이 먹힐 때 아나함이 되었고,

심장이 먹힐 때 무애 혜를 갖춘 아라한이 되어 다음의 감흥을 읊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몸이 먹히는 동안 정신을 잃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계행을 갖추고 서계를 구족하였고

지혜를 갖추고 선정에 깊이 들었다.

잠시 방일한 틈에 호랑이가 사로잡아

몸통을 낚아채어 바위산으로 물고 갔다.

호랑이는 뼈다귀와 근육까지 나를 먹어 들어갔지만,

오염원들을 버리고 나는 해탈에 도달한 것이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게 최후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아라한이 된 예는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신 게송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육신이란 더러움으로 가득 찬 오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오온을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오온을 버리고 아라한이 되어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사실이 주는 것은 우리들이 몸과 마음을 집착할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은 알아차릴 수행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온에 집착하면 우리는 갈애가 생겨서

고통스러운 윤회를 계속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10.10 12:46:04 | 내 블로그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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