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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 三法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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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idsee8512    
애국 (mcidsee8512)
제행무상 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제법무아 諸法無我 변하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
일체개고 一切皆苦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
여기에 열반적정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이 네가지를 넣어 사법인 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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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강산 도인 석두보택 스님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금강산, 호남에서 수행 전법

친일 승려 이회광에 ‘일침’

효봉 향봉 석정 등 제자 배출




- 석두보택(石頭寶澤) 스님 -


소년 시절 출가하여 금강산과 호남을 중심으로 선풍(禪風)을 진작 시킨 석두보택(石頭寶澤) 스님.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며 납자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순창에 머물 당시 한국전쟁을 맞은 스님은 마을 주민과 피난민을 보살피는 선행을 하는 등 출세간을 구분하지 않았다. 석두스님의 수행일화를 송광사와 미륵사에 있는 비문과, 상좌 석정스님의 생전 증언을 종합하여 정리했다.

○… 안변 석왕사로 출가한 스님이 당시 노전(爐殿) 소임을 보고 있던 백하(白荷)스님을 만나 불문(佛門)에 들 것을 청했다. 그 자리에서 백하스님은 “어제 밤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오늘 네가 왔구나”라면서 “예로부터 용꿈을 꾸고 제자를 받으면, 그 제자가 선지식이 된다고 한다”며 출가를 허락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법명과 당호를 지어 주었으니, 용음보택(龍吟寶澤)이었다. 석두(石頭)라는 법호는 훗날 다시 지은 것이다.

○… 공부의 진전이 더디었다. 조급한 마음에 경서(經書)를 두루 섭렵했다. 불법(佛法)의 대의(大義)와 심오한 교리를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이 늘 답답했다. 의심을 풀 방법을 찾지 못한 석두스님이 선지식을 찾아 나섰다. 책이 가득 찬 걸망을 열어보이며 선지식에게 질문을 했다. “스님, 이렇게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마쳤는데, 이 밖에 부처님 가르침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에 범상치 않은 기틀을 알아챈 선지식이 “자네가 가지고 온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면 알려 주겠네”라고 답했다. 석두스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져온 책을 모두 아궁이에 넣고 왔다. 그러자 선지식이 말했다. “불태울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인가” 석두스님은 그 물음에 마치 천길 낭떠러지에 나선 듯 했다고 한다. 그 후로 불철주야 용맹정진에 들어가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 금강산에서 출가한 석두스님은 1905년 해인사로 옮겨 정진했다. 퇴설당(堆雪堂)에 머물며 화두를 참구하던 스님은 이듬해 크게 깨달았다고 전한다. 또한 27세 되던 1907년 동안거 해제법회에서 당시 해인사 주지의 법문을 일침을 놓아 막았다. 당시 해인사 주지는 대표적인 친일 승려 이회광으로, 당대의 실권자이자 실력자였다. 누구도 그의 말을 막지 못했다. 더구나 법상에 올라 설법을 하는 것에 시비할 수 없었다. 이회광이 법당에 앉은 대중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금일(今日) 시회대중(時會大衆)이 모두 산승(山僧)의 입에서 나왔다.” 오만한 그 말에 아무도 거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석두스님이 일어나 이회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화상(和尙)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해인사 주지는 답을 못했다. 그러자 석두스님은 한마디 더 하고 법당을 나섰다. “범부에게 법문을 들을 수 없소.” 그 길로 스님은 해인사를 떠나 금강산으로 주석처를 옮겼다.




- 석정스님이 그린 석두스님 진영.


○… “圓覺道場何處(원각도량하처) 現今生死卽是(현금생사즉시)”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해인총림 해인사의 장경각 입구에는 이같은 내용의 주련이 걸려 있다. “원각(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의 도량이 어디에 있나,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가 원각이라네”라는 의미이다. 석주스님 은사인 남전(南泉)스님이 나무에 글씨를 새겨 주련을 걸었다. 그런데 이 글의 내용은 석두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에 느낀 소회라고 전해지고 있다. 석두스님과 남전스님은 도봉스님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학원 설립을 주도할 만큼 친분이 깊다.

○… 석두스님은 서예도 뛰어났다. 전하는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스님의 붓글씨는 물 흐르는듯 자연스러우면서 산 같은 기상을 품고 있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서장(書狀)>에 나오는 ‘所知障煩惱障(소지장번뇌장) 一狐疑了一狐疑(일호의료일호의)’라는 글씨를 쓴 작품이 대표적이다. ‘金剛山(금강산) 無化子(무화자)’라는 서명이 눈에 들어온다. 무화자는 스님의 자호(自號)이다. 1940년부터 송광사 차안당(遮眼堂)과 순창 순평암 등에 머물던 스님은 1952년 부터는 붓을 잡지 않았다. 스님의 예술가적 소질은 훗날 불화(佛畵)의 대가로 인정받은 제자 석정(石鼎)스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일제강점기 법관을 지낸 효봉스님이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을 거듭하다 ‘참된 인간의 길’을 찾겠다는 뜻을 세웠다. 판사직을 던지고는 허름한 옷을 입고 3년간 전국을 방랑했다. 신분을 감추려고 엿장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다 우연히 금강산에 있는 사찰을 찾았고, 발심(發心)하여 출가의 뜻을 세웠다. 이때가 1925년 여름이다. 장안사 스님들에게 천거 받은 스승이 신계사 보운암에 주석하고 있던 석두스님이다. 한눈에 수행자가 될 가능성을 확인한 석두스님이 단박에 출가를 허락했다. 법명은 학눌(學訥), 법호는 효봉(曉峰)이었다. 석두스님은 ‘금강산의 도인’이라 불리며 수행자의 표상으로 존경받고 있던 선지식이었다.

○… 석두스님은 참선 수행을 위주로 한 수좌였다. 평소에 달마조사의 게송을 자주 전했던 스님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참선해야 한다”고 경책했다. 자칫 공부의 깊이가 얕은 상태에서 자만하고 정진을 게을리하면 올바른 참선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자주 읽으며 공부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수심결>은 번뇌로 고통 받는 중생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스님은 <미륵상생경>과 <유마사행론>도 자주 인용해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 석두스님 어록

재물과 색을 버리지 못하거든 도(道)를 묻지 말고,
내 잘난 생각 갖고는 참선을 하지 말라.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니,
이 밖에 다른 법은 일러 줄 것이 없다.

- 석두스님이 평소 후학과 신도들에게 자주 말한 ‘달마조사송(達磨祖師頌)’


네가 잘못은 했지만 속이지 않으니 용서한다.

- 잘못을 참회한 상좌에게


다른 복을 짓는다고 해도 부족하니,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

- 후학들에게 참선 공부를 당부하며.


■ 석두스님 발자취






- 송광사 승려 연성대회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 앉아 있는 석두스님. 송광사 성보박물관


    1882년 9월 4일(음력)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에서 부친 임치권(林致權) 선생과 모친 김해 김씨 슬하에서 5남매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상하(尙夏). 소년 시절에는 병법(兵法)을 배워 장수가 되고 싶었지만, 일제 침탈에 실망하여 출세(出世)의 뜻을 접고 출세간(出世間)하여 수행자가 됐다. 16세에 안변 석왕사에서 백하청호(白荷晴昊)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백하스님은 “장차 선지식이 될 것”이라며 보택(寶澤)이란 법명을 주었다. 은사 회상에서 정진하며 범패(梵唄)도 익히며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후에 함북 명천군 쌍계사 주지 소임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등에서 정진했다.

    25세 되던 해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산스님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듬해 겨울 무자(無字)화두를 타파하고 깨달음을 성취했다. 이후 가야산, 금강산 등 명산에 있는 제방 선원에서 수행했다. 1909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영봉(靈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 미륵암, 여여원, 봉래암 등에서 후학을 제접했다. 47세 되던 해에는 효봉스님에게 법을 전했다.




-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 앞에 모인 대중들.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석두스님.

    전주 남고사, 곡성 도림사, 남원 백우암, 순천 송광사, 순창 순평암에 주석하며 정진하며 호남에도 법향(法香)을 전했다. 71세에 통영 미륵도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겼으며, 1954년 4월25일(음력) 열반에 들었다. 세수 73세, 법납 57세. 스님의 비(碑)는 조계총림 송광사와 통영 미래사에 있다. 효봉학눌(曉鳳學訥), 향봉향눌(香峰香訥), 화봉유엽(華峰柳葉), 계봉무아(溪峰無我), 해봉석정(海峰石鼎), 석봉인선(石峰仁善), 은봉원광(隱峰圓光) 스님 등을 제자로 두었다.



2019.08.14 10: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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