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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 三法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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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idsee8512    
애국 (mcidsee8512)
제행무상 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제법무아 諸法無我 변하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
일체개고 一切皆苦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
여기에 열반적정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이 네가지를 넣어 사법인 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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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이야기


~*~ 조선 중종 때 여인 ″황진이(黄真伊)″ 이야기 ~*~



조선 중종 때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黄真伊)는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으로 보면
중종 때 사람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그녀가 상대한 사람들의 일화로 보아 1520년대에 태어나서
1560년대쯤에 생을 마쳤을 것이라 추측한다.

황진이는 진현금이라고 하는 아전 출신인 여인의 딸이었다.
진현금이 어느 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눈이 맞았다.

둘은 서로 정을 통하였지만 반상이 엄격하던
그 시절에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진현금은 혼자서 딸을 낳았는데, 바로 그 아이가 황진이었다.

황진이 어머니, 진현금은 그다지 이쁜 얼굴은 아니었으나
황진이는 달랐다. 지나가는 사람이 백이면 백,
그녀에게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절세미인이었다.

황진이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규수 못지 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웠다.

여덟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열 살 때는 이미 한문 고전을 읽고,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또 서화에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나
이렇듯 아름답고 총명한 규수로 자랐다.

그가 15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황진이를 연모하던 순진한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만 하다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를 보다 못한 젊은이의 어머니는 황진이의 어머니 진씨를
찾아가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하지만 진씨는 냉정하게 거절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딸 황진이에는 이런 이야기를 숨겼다.
젊은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어느 날, 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집 문 앞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기이하게 생각하였으나 알고 보니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황진이는 소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 주고
슬프게 곡(哭)을 하여 상여는 지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첩의 딸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봉건적 윤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기생 황진이의
거침없는 성격과 미모는 돋보이기 시작했다.
한양에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대단한 숙망이었고 자랑거리로 여길 정도였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다.
학자는 화담 서경덕이었고, 선승은 지족암에서
삼십 년 동안 참선한 지족선사였다.

지족선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황진이는 평소에 이 두 사람을 흠모하였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해 보려고 황진이는 마음먹었다.

먼저 서경덕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부탁을 하였고
서경덕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서경덕을 찾아가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경덕과 같이 공부를 하다가 자연스레 침실에 들었다.
평소에도 선비들의 숙망이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천하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서경덕도 건장한 남정네였다.

그렇게 수 년 동안을 서경덕과 한 방에서 동거를 하며 지냈다.
그동안 황진이는 온갖 수단의 애교로 서경덕을 유혹했으나
그는 거짓말처럼 천하에 둘도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황진이의 끊임없는 유혹에도 서경덕은 목불(木佛)과도 같았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어 황진이도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서경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松都三絶)의 하나이십니다."

"송도3절은 무엇이더냐?"
"하나는 박연폭포요, 그리고 선생님이시며 다른 하나는 접니다."
라는 대답을 하였다.

그 후에 황진이는 지족선사를 찾았다.
황진이는 지족선사에게 제자로 수도하기를 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족선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여자를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황진이는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갔다.

그리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해 백일간 불공을 드린다고 하였다.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했다.

황진이는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문을 써서 청아한 목소리로 처량하게 읽었다.
축문이 마치 천사의 노래처럼 맑았다.

그녀는 얼마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였다.
노선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려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청아한 목소리,
단아한 자태, 한결같은 정성에 점점 마음이 기울어,
십년 동안이나 질끈 감아 옆 사람도 잘 보이지 않던 눈이
조금씩 뜨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한 번 보고 두 번 보다 자꾸 눈에 뜨이니
선계의 정념이 점점 엷어지고 본념이 점점 일게 되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일부러라도 가서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황진이는 능란한 사교성과 수완으로 바위 같은 선사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여 결국 파계시키고 말았다.

10년 동안 면벽 수도했지만 한 여자에 의해
파계한 지족선사를 일러 ″망석중 놀리듯 한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도 생기게 되었다.

황진이는 남녀 간의 애정을 짙은 서정으로 섬세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청산에 벽계수야″,
동짓날 기나긴 밤을″ 등 주옥같은 시편들이 전해 진다.

황진이는 자유분방한 성격대로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녀의 명성을 듣고 있던
서울의 한 젊은이가 개성으로 놀러를 왔다.

젊은이도 유람을 좋아한다는 말에
황진이는 금강산을 같이 가자고 하였다.
젊은이도 선뜻 응해 나섰다.

황진이는 번잡한 행장을 다 버리고 굵은 삼베치마에
망태를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동행한 젊은이 역시 무명옷에 삿갓을 쓴 봇짐차림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시원한 등산복 차림으로 떠난 배낭여행인 셈이다.
그때만은 남녀 관계를 떠나 금강산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고자 한 것이었다.

유람길에 나선 그들은 수백 리 길을 걸어서 금강산에 이르렀다.
과연 소문대로 금강산의 절경은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황진이와 젊은이는 날마다 희열에 넘쳐
금강산의 명소를 둘러보며 서로 화답시도 지었다.

둘은 아름다운 산천경관을 즐기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꿈같은 유람에 어느듯 노자도 떨어지고
거의 굶다시피하는 지경이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쫄쫄 굶을 지경이 된 이 젊은이는
″이러다 나 죽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만 황진이와 헤어져 그녀를 남겨두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유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행 중 다친 다리를 이끌고 민가나 절간에서 밥을 빌어먹으면서도
금강산의 명소들을 다 돌아보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여인의 행적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의 사물이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집념에 가까워
웬만한 남정네들을 뺨쳤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황진이는 마흔 전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이런 유언도 남겼다.
″자기가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개미, 까마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부탁하였다.
그녀의 거침없는 성품과 시적인 정서를 말해 준다.

그녀는 다방면으로 재주는 많았으나 안타깝게도 덕은 좀 부족하였다.
그가 운명을 달리한 후, 그의 이웃은 개성 근처에 그를 묻어주었다.

북한 조선중앙 tv는 개성시 선정리에
황진이의 무덤을 복원했다고 몇 해 전 전한바 있다.




*
2019.06.19 15: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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