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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 백년여관

 


늦여름 한낮의 대흥사(大興寺) 숲길은 치밀하고 찬란했다. 전남 해남 두륜산에 자리한 천년 고찰 대흥사까지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십리 숲길. 삼나무, 측백나무, 소나무, 동백나무, 왕벚나무, 편백나무, 서어나무, 떡갈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음침하거나 답답하지는 않았다. 잎과 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초록 숲길을 환히 밝혔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빛이 신비했다.

이 숲길에서도 풍광이 가장 빼어나다고 꼽히는 곳이 유선관(遊仙館) 일대다. 매표소에서 숲길을 따라 1.2km쯤 올라가면 나오는 피안교(彼岸橋) 직전, 숲길과 계곡 사이 자리 잡은 오래된 한옥. 한국 영화계 거장 임권택 감독이 ‘장군의 아들’ ‘서편제’ ‘천년학’을 촬영한 곳이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해 더 유명해졌다. ‘100년 여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알려진 이곳이 최근 한옥 호텔로 거듭났다.

유선관 입구. 김대균 건축가는 대흥사 숲길 쪽으로 나 있던 문을 막고 부속관 쪽으로 입구를 틀어 동선을 두륜산 산세와 숲길, 계곡에 따라 맞췄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선관 입구. 김대균 건축가는 대흥사 숲길 쪽으로 나 있던 문을 막고 부속관 쪽으로 입구를 틀어 동선을 두륜산 산세와 숲길, 계곡에 따라 맞췄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권택, 서편제 그리고 노랑이

유선관은 올해로 84년 됐다. 유선관 개·보수를 맡은 건축가 김대균 착착스튜디오 소장은 “수리 과정에서 상량문(上樑文·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을 적은 문서)이 발견됐는데, 여기에 유선관 건축 연도가 1937년으로 나온다”고 했다.

원래는 대흥사를 찾는 수도승이나 신도들이 머무는 객사(客舍)였다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여관 영업을 시작했다. ‘1960년대 광주 유곽 출신의 한 기생이 사들여 유선여관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현재 유선관 운영을 맡은 한동인 공동 대표는 “지금은 저 아래에 있는 매표소가 과거에는 피안교 앞에 있었고, 피안교 밑으로 식당이며 숙소, 상점 수십 채가 모여 있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유선관 일대가 사하촌(寺下村)이었다는 얘기다. “1990년대 초 대흥사가 관광위락시설 단지를 재정비하면서 사하촌에 있던 상업시설들을 주차장 밖으로 철거했습니다. 유선관은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일하게 살아남았죠.”

유선관 진입로에 놓인 옛 피안교 입석. 1972년 태풍 베티로 유실됐다가 최근 폭우 복구공사 도중 계곡에서 발견됐다. '彼岸橋' 글씨는 김종필 전 총리가 썼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선관 진입로에 놓인 옛 피안교 입석. 1972년 태풍 베티로 유실됐다가 최근 폭우 복구공사 도중 계곡에서 발견됐다. '彼岸橋' 글씨는 김종필 전 총리가 썼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권택 감독이 이곳을 처음 찾은 건 1970년대 초. 그는 ‘서편제’와 ‘장군의 아들’,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 등을 유선관에서 찍었다. 천년학 촬영 중 칠순을 맞은 임 감독은 유선관에서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임 감독은 본지 통화에서 “대흥사 구경도 하고 로케이션 헌팅도 하러 갔다가 유선장(유선관)에 머물게 됐다”고 말했다. “장작불 때는 구들이 있는 온돌방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의 따뜻함이 좋아서 계속 찾게 됐지요. 전라도 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렀어요. 이렇게 유선장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립고 보고 싶네요.”

유선관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유홍준 전 청장이 1993년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서다. “1981년쯤 대흥사로 답사 갔다가 처음 유선여관을 찾았다”는 그가 이곳 단골이 된 데는 ‘노랑이’가 한몫했다. 책에 “유선여관을 내가 자주 찾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집의 누런 개 ‘노랑이’ 때문”이라고 쓴 그는 “어미 노랑이는 참으로 영리하였다. 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고는 이른 새벽 등산을 가거나, 대흥사, 일지암 어디로 가든 꼭 앞장서서 안내하고 그 손님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아야 집으로 돌아간다”고 덧붙였다. 영물이던 노랑이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유선관 현판 글씨는 호남 중진 서예가 금초 정광주씨가 썼다. 현판은 고산윤선도유적지에서 벼락 맞고 쓰러진 500살 은행나무로 만들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선관 현판 글씨는 호남 중진 서예가 금초 정광주씨가 썼다. 현판은 고산윤선도유적지에서 벼락 맞고 쓰러진 500살 은행나무로 만들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씨간장 같은 공간으로

한동인·배시정 공동 대표가 유선관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지난해다. 배 대표는 한국 전통 문화를 현대 생활 양식에 맞춰 해석해 다시 만들어내는 디자인기업 ‘비애이(BAE)’의 대표. 그의 어머니는 드라마 ‘궁’의 의상을 비롯해 평생 한복을 지어온 배영진씨다. “지인 소개로 해남에 내려와 유선관을 봤어요. 이런 훌륭한 한옥이 있다는 데 놀랐고, 멋지게 되살리고 싶었죠.”

해남에서 나고 자란 한 대표는 “유선관 앞 계곡은 초등학교 때 소풍 오던 추억의 장소”라고 했다. “홍콩의 어마어마한 재벌이 해남에 오고 싶다는 거예요. 이분을 어떤 숙소로 모실까 찾아봤는데, 모실 만한 데가 없었어요. 유선관을 어떤 분이 오더라도 편하게 지낼 시설로 만들자 결심했죠.”

유선관 중정. 바닥에 깔려 있는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마사토와 자갈을 깔았다. 굴뚝 아래 일본풍 조경도 제거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선관 중정. 바닥에 깔려 있는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마사토와 자갈을 깔았다. 굴뚝 아래 일본풍 조경도 제거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들은 유선관 개·보수를 김대균 소장에게 맡겼다. ‘양구백자박물관’ ‘소록도 작은 미술관’ ‘베네딕토 수녀원 대구분관’ ‘천주교서울대교구 역사관’ ‘이상의 집 리노베이션(개·보수)’ 등의 프로젝트를 해온 김 소장은 “유선관 리노베이션을 맡으면서 씨간장을 떠올렸다”고 했다.

“옛 모습 그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박제밖에 되질 않지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결합하며 생명을 지속하고 가치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씨간장이 새 간장을 더해 생명을 이어가듯, 유선관이 지닌 핵심 구조는 유지하되 현대인이 불편함이 없어 계속 이용하는 공간이 되어야겠다 싶었지요.”


객실은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으로 디자인한 물건으로 채웠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객실은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으로 디자인한 물건으로 채웠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문화를 파는 시대

김 소장은 유선관 건물의 핵심 구조물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신 크고 작은 방들을 통합해 방 6개로 쪼갰다. 방에는 화장실과 샤워 부스를 넣었다. 씻거나 용변을 보려면 방을 나와 공동 샤워장이나 화장실로 가던 불편을 없앴다. 전통 창살문처럼 보이지만 유리와 쇠로 된 현대식 새시를 설치해 한옥의 고질적 문제인 웃풍을 차단했다.

배 대표는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물건들로 유선재를 채웠다. 객실에 배치한 소반은 안문수 작가의 ‘스튜디오 루’가 제작했다. 전통 목화솜 이불과 요는 비애이 작품이고, 식당과 스파에 설치한 테이블과 의자는 ‘스탠다드A’가 한옥 서까래와 처마선을 모티프로 디자인했다.

유선관 객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선관 객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유선관 마스코트였던 노랑이는 한옥 호텔 운영이 궤도에 오르면 진도에서 진돗개 한 마리를 분양받아 대신할 예정이다. “노랑이는 없느냐고 찾으시는 분들이 하도 많아서요(웃음).” 한 대표는 “유선관 역사를 우리가 앞으로 100년, 200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문화를 파는 시대 아닙니까. 한국 문화를 파는 일을 여기, 땅 끝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자료제공 : 조선일보




~ ♪ Speak of the Hearts ♪ ~
 
2021.09.04 11: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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